"토니 스타크는 이걸 동굴에서 만들었어! 그것도 고철로!"
"죄송합니다만, 전 토니 스타크가 아닙니다"
나는 종종 유튜브에서 자동차 정비사들의 '다 망가진 자동차 살리기' 같은 콘텐츠를 보곤 한다.
영상에서도 온갖 다양한 이유로 차량들이 입고되긴 하지만, 본질적인 자동차의 기능은 단순하다. '앞뒤로 잘 가냐', '옆으로 가냐', '정지하냐', 그 정도가 전부다. 대부분 문제가 되는 자동차들도 이 기능들이 잘 되지 않기에 정비센터에 실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단순한 몇 가지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기술적 문제는 놀라울 정도로 많다. 3만 개에 달하는 부품의 개수는 차치하고라도 그 부속들이 작동하기 위한 메커니즘, 엔지니어링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정비사들이 엔진룸을 뜯어보고 차근차근 부품의 상태와 그 기능에 대해 설명하면서 원인을 찾아들어가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더구나 차종, 회사 브랜드, 엔진이나 변속기까지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니 제대로 된 정비사가 알아야 할 부품은 수천수만 종에 이르고 기술적 문제도 그만큼 늘어난다. 게다가 자동차는 매년 발전하고 신기술이 적용되기 때문에 연식에 따른 수리법도 익혀야 한다.
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이런 기술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건 그 원리가 글쓰기와도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기능 자체는 단순하다. 어떤 종류의 글쓰기라도 단지 하얀 지면에 문장 몇 단락으로 된 줄글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하지만 완성된 작품도 '제대로 읽히느냐 읽히지 않느냐'의 문제가 항상 '퇴고 센터'에 입고되기 마련인데, 단순해 보이는 이 행위에도 자동차 정비에 쓰이는 부품의 개수처럼 무수히 많은 단어와 의미상호작용, 형식과 언어 조립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겠지만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글쓰기를 너무 단순하게 여기고 조언해 주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처할 때가 있다. 마치 자동차 정비사가 어떤 손님에게 15년 된 낡은 콤팩트카를 가리키며 '페라리처럼 빠르게 달리게 하면 이 차도 페라리가 될 수 있잖아요?'라는 말을 듣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랄까. 영화 <아이언 맨>에서 초소형 아크 원자로를 만들라며 닦달하는 오베디아에게 '죄송하지만 저는 토니 스타크가 아닙니다'라고 대꾸하는 연구원의 얼굴 표정을 나도 종종 하게 된다.
상대보다 우월한 위치를 강조하고 군림하려는 의도로 알 없는 훈수를 두며 면박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좋은 마음임에도 분야를 잘 모르거나 아는 한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려는 케이스도 분명 있다. 전자라면 인연을 끊던지 한 귀로 듣고 말면 그만인데, 후자라면 마음이 조금 불편해진다. 정말 나를 생각해서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인데도 자기 뜻대로 되질 않고, 받는 내 입장에서도 도움이 되질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 분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도 몇 마디 말로도 큰 도움을 줄 때가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는 훈수를 잘못 두는 사람이 대체로 두 가지 경향을 보인다는 걸 발견한다.
먼저 '심슨의 역설(Simpson's paradox)'을 살펴보자. 영국의 통계학자 에드워드 심슨은 1951년에 사람들이 평균값을 기초로 논증할 때 평균의 오류로 인해서 실제 데이터와는 다른 현상을 받아들이는 모순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다른 조건을 배제하고 연봉으로만 두 회사를 평가해 보자. A회사의 평균 연봉이 3천만 원이고, B회사의 평균 연봉이 4천만 원이면 당연히 B회사가 더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은 B회사 직원 한 명의 급여가 압도적으로 높아서 평균치를 올리는 바람에 실제로는 A회사가 더 좋은데도 평균의 오류로 잘못 판단해 B회사를 고평가 한다면,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은 상상했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사무실 풍경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전체를 보지 않고 두드러진 어떤 지표를 믿고 내리는 판단은 때때로 매우 심각한 오류를 낳는다.
콘텐츠 세계에선 종종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예컨대 유튜브에서 어떤 콘텐츠가 조회수가 천만이 나와서 인기 급상승 영상이 되고 트렌딩 리스트에 오른다고 생각해 보자. 그걸 본 친구가 초보 유튜버에게 '요즘 저런 영상이 뜨더라. 너도 해봐'라고 한다면 어떨까. 알고 보니 비슷한 영상을 찍은 유튜버가 만 명에 달하고, 그 만 명중의 한 명의 영상이 우연찮게(사실은 기술적으로) 조회수가 터져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초보 유튜버는 결국 조언을 따랐다 본전도 찾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장비를 당근마켓에 팔게 된다.
이와 또 유사한 방식으로 '훈수 초보'들은 '권위 호소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분야에서 어떤 권위를 갖는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에 기대어 주장을 강화하는 사람들은 주장에 오류가 있어도 권위에 묻으려고 한다. 광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오류는 예를 들어 칫솔을 팔면서 '치과의사협회'라는 딱지를 붙여 놓는 것이다. 칫솔이 실제로 이를 잘 닦는지에 대한 여부는 상관없이 '치과의사연합이 추천하는 칫솔이니 너도 써'라고 한다면, 그 말을 믿어야 할까. 치과의사가 직접 타사 칫솔과 비교 실험을 진행하며 더 나은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 한, 제품 하단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황금 스티커만 보고 판단하기는 무리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 분야의 장인이 이룬 업적이나 권위를 보편현상으로 여기고 모든 일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것은 평균의 오류처럼 곤란함에도 '권위 호소 훈수'는 종종 일어난다. 현대미술을 갓 배우는 미대생에게 막연히 '너는 뱅크시를 본받아야 해'라고 하는 조언이 효과가 있을까? 뱅크시의 예술성과 그 미대생이 실제로 해야 할 작품 활동 사이에는 방법론이나 분야가 다르다던가 해서 큰 연관성이 없을 수도 있다. 더구나 어떤 것은 한 사람의 필생의 결과물이거나 독창성이 깃든 것으로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말 한마디로도 유용한 훈수를 두는 사람은 일단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것을 잘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로 너무 높은 이상이나 기자의 피라미드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도드라진 풍경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이야기'를 즐겨한다. 무엇인가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그 밑에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시도되고 동시에 숨겨진 장치들이 맞물려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자, 앞에서 본 정비사에게 '콤팩트카를 페라리로 만들라'는 손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부품 몇 개 조물딱거리면 무슨 자동차든 제로백이 3초가 될 수 있다는 황망한 소리를 치우고 '엔진에 터보 차저를 추가해서 출력을 높일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을 하게 됐다고 하면 정비사는 어떨까. 아마 그 정도는 해볼 만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과는 '차가 앞으로 가냐, 안 가냐'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이 자동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란 믿음이 생길 것이다.
사실 좋은 훈수를 두는 사람은 이미 내가 속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사람일 확률이 크다. 그래서 대개 비슷한 분야의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 자문해 볼 수 있는 경험 자체에 근거한 조언을 하는 사람들 역시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다.
이를테면 분야는 다르지만 인간으로서 같은 공감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내가 인간관계에 대한 글을 쓴다고 했을 때, 그 글을 쓰는 방법이나 정통한 작가를 내게 알려주는 것보다는 자신의 직장 생활이나 인간관계 경험을 들려주며 견해를 만들어 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된다. 또한 어떨 때는 물리적 한계로 모든 영화를 볼 수 없는 나에게 미처 보지 못했던 영화를 추천해 준다거나, 읽었던 책의 좋은 문구를 알려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런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도 살아있는 생동감 있는 지식이지만 내게 적용해도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의 확장이기도 하다.
무인도에 떨어진 굶주린 사람에게 고든 램지의 스테이크 조리법이 소용이 있을까. '무인도에서 떨어져 구출된 사례' 몇 가지를 알려주는 게 소용이 있을까. 그보다는 불을 지피는 방법과 식수를 조달하는 방법을 함께 토론하는 게 더 건설적인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조언을 주는 사람을 곁에 두려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걸 믿는 사람, 그러면서 '눈앞에 보이는 걸' 말하는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그러면 최소한 당신이 괜한 훈수에 불편한 사양의 말까지 매번 전하며 피곤해질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