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빈센트 반 고흐의 노란 집

by 민경민
%EB%8B%A4%EC%9A%B4%EB%A1%9C%EB%93%9C.jpg?type=w800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The Yellow House)>, 1888, 캔버스에 유채, 91 x 72 cm

빈센트 반 고흐는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예술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파리에서 인상주의를 접하고 이내 아를로 자리를 옮겨 예술가들의 공동체인 '노란 집'을 꾸렸다. 전형적인 외골수였던 그가 다른 화가들과 어울려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어쩌면 그는 외로웠기 때문에 더더욱 자기 세계에 빠져들고 그 깊은 우물에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자살하기 직전까지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1889), <까마귀가 나는 밀밭>(1890) 같은 그림으로 압도적인 슬픔을 표현한 것을 생각해보면, 죽기 2년 전에 그린 <노란 집>(1888)은 우울 속의 마지막 희망처럼 보인다. 짙은 파란색을 꾹꾹 눌러 담은 하늘과는 달리 노란 집은 따스한 색감과 세밀한 붓터치가 엿보인다. 파란 하늘과 노란 땅의 대비가 절망과 희망의 대비라면, 그는 분명히 이 작품에서 절망보다 희망을 더 섬세하게 다루었다. 더욱이 <노란 집>은 하늘보다 땅이 더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조금씩 무겁고 차가운 하늘이 따뜻한 대지를 내리누르는 형국이지만 당시의 그에게는 내리깐 슬픔을 밀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차갑게 식어버린 열망은 딛고 설 땅과 인간의 삶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다. 초기 습작과는 달리 이 시기 고흐의 그림 속에 그림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점도 그의 의지를 잘 투영해준다.


고흐는 그가 수없이 습작한 '해바라기'들처럼, 언제나 희망이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세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가난한 화가에게는 냉정했다. 고흐는 사람이든 생활이든, 언제나 서툴러서 비난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공들여 꾸민 '노란 집'에 오겠다는 화가들도 없었다. 오직 고갱만이 고흐와 함께했지만 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논쟁을 벌인 뒤 떠났다. 동생 테오가 늘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주기는 했지만 그는 그림을 파는 화상이어서 빈센트와는 함께할 운명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는 늘 혼자였다. 온 세상이 버리라고 외치는 핏덩이를 가슴에 안고 차마 버리지 못해 끝까지 함께하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screencapture-youtube-watch-2022-07-28-01_10_35.png?type=w800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에 묘사된 테오와 빈센트. 테오는 그의 형을 단지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돌보지 않았다. 그는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그랬듯 '위대한 예술가를 위해 인류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며 빈센트를 예술가로서 존경했다.


고흐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 계기에는 동생 테오의 외면이 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테오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들이 그를 죽음의 덫으로 안내했다. 빈센트와는 달리 수완이 좋았던 테오는 꽤 실력 있는 화상으로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평판을 쌓으며 입지를 늘려갔다. 형의 세계를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빈센트에게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어준 것은 물론 물질적인 부분도 아낌없이 도왔다.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빈센트는 그런 테오에게만은 줄곧 많은 부분을 의지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민경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영화, 삶, 인간, '지적 감성인'들을 위한 사유 공간입니다.

1,810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1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7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어째서 아이유만 성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