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쯤일까. 친한 친구가 이성을 소개해준다기에 거절한 적이 있다. 마침 부산에 들른 친구와 만나 저녁을 함께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요는 내가 아직 내가 꿈꾸는 것들을 이루는데 집중을 하고 싶다는 말을 했고, 덧붙여 나는 내 글을 읽어 줄 사람이 아니면 관심이 잘 가지 않는다고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도 밤잠을 쪼개가며 했던 일이 글쓰기였고, 인생이 최악일 때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게 펜과 종이였다.
책을 쓰는데 아내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저자들의 감사 인사를 이따금 보고 있으면 부럽다는 생각도 들고 외로운 기분도 들기는 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어떤 바람을 갖고 있든지 간에 그건 오직 내 사정일 뿐, 상대에게 억지로 내 가치를 강권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기에 나는 잠자코 내 할 일을 하며 살뿐이었다.
만찬이 끝난 이후에도 이 주제로 친구와 한참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은 모양이었던지, 지난 달 즈음 친구는 내게 《오페라의 유령》티켓을 보내왔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986)은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의 소설을 원작으로 극작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뮤지컬로 각색한 작품이다. 한국어 초연은 2001년에 열렸고, 2009년에도 열린 바 있으나 올해 부산의 드림씨어터에서 열린 공연은 지방에서 열린 첫 번째 공연이다. 주인공 '유령' 역을 배우 조승우가 맡아서 더 화제였던 이번 공연은 과연 명성이 헛되지 않은 공연이었다. 호주 공연에서 쓰였다던 1톤짜리 샹들리에를 객석을 향해 떨어뜨리기도 하고, 공연 중에 배우들이 갈아입는 의상만 400벌에 달한다고 한다. 웅장하고 화려한 연출과 일반적인 연극에서는 볼 수 없는 무대장치의 활용은 분명 특별한 경험으로 남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객석에 앉은 관객들에게나, 친구의 편지를 받고 공연을 보러 온 나에게나 가장 중요하고 돋보였던 건 역시 '유령이 된 남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극의 주인공 '유령'은 천재적인 극작가로 한 극장의 지하에 운둔하며 극장에 올라오는 모든 작품들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극장 운영자들은 자기 의지에 반하면 온갖 괴이한 일들을 꾸며대는 유령을 없애고 싶은 눈치지만, 그의 천재적인 극작과 연출 솜씨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극중 인물들의 대사로 추정해 본다면 유령은 어릴 적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인 데다, 불의의 사고로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고 흉측한 몰골이 된 상태다. 그런데 그의 재능만은 뛰어나서 온갖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데, 마담 지리가 라울에게 유령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 그를 철학자, 건축가, 음악가, 작곡가, 발명가라고 소개한다.
극에서 묘사된 것처럼 과연 유령은 마술에 능통하고 건축에 대한 이해가 수준급이어서 극장 내의 온갖 시설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페르시아 황제의 초대를 받아 미로를 건설한 적도 있고 음악에 관해서는 '음악의 천사'로 불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유령은 자기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어서 항상 하얀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사람들과도 만나지 않은 채 오페라 지하의 미궁에 있는 철창에 스스로 갇혀 온종일 연주를 하거나 극 대본을 쓰는데 몰두한다.
이쯤 하니 나는 문득 만화 <베르세르크>의 작가 미우라 켄타로가 떠올랐다. 수만 명의 용기병이 도열한 장면의 기병들을 하나하나 손그림으로 그려 넣을 만큼 만화의 모든 장면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작가로 유명했지만, 사망하기 전에 그는 '2년 간 휴대전화 착신 전화가 0 통이었다'며 많은 부와 명성을 얻었음에도 작품에 몰두하느라 인생은 피폐해졌다는 말을 남기고 54세가 되던 해 영면에 들었다.
어쩌면 친구는 내게서 이 같은 모습을 발견한 건 아닐까 싶다. 위대한 철학자 니체도 말년엔 정신병원에 갇혀 '여자를 내놔라!' 하는 헛소리를 했다고도 하고,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마지막까지 단란한 가정을 꿈꾸다 자기 희망을 잃고 자살을 했다. 경이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행위하다가도 말년에는 하나 같이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빠진 예술가나 철학자들을 보면 사실 인생에서 진짜 이뤄야 하는 건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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