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다는 착각

by 민경민

*본 콘텐츠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한 뒤에 보면 더욱 좋습니다.

JYTIsjw-VL1nctN3XCjiPk7fHLM.PNG


하루는 인터넷에 지난날 써놓았던 단편 소설을 갈무리해 올렸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작가로서 글을 칭찬받으면 당연히 기분은 좋지만 글 밑에 달린 댓글 하나를 보고는 마음이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독자 한 분이 오랜만에 소설을 써보려고 사이트에 방문했다가 내 소설을 보고 소설 쓰기를 포기했다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보면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대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것이다. 학창 시절에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그저 취업 잘된다는 학과에 성적을 맞춰서 왔다는 후배는, 막상 강의를 들어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 나름 자기가 가장 잘하는 걸 선택해서 다시 전과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선택한 게 국문과였으나, 후배는 결국 펜을 들지 않았다. 대신 내게 '선배 같은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글쓰기는 포기했어요'라는 말을 전한 뒤 취업 전선에 곧장 뛰어들었다.


문학에 남들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열중한 건 사실이지만, 내가 뭐라고 어렵게 선택한 길을 엎을 것까지 있을까. 진심으로 나는 내가 쓰는 글에 완전히 만족하지도 못했고 살면서 시를 처음 써본다는 사람의 시가 너무 좋아 충격받았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글에 관한 한 누가 더 '적합하다'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 주변에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권해왔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문득 두려운 생각을 갖게 됐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그래, 네가 있으니 여긴 믿고 맡기마' 하며 달리는 열차의 기관실 문을 걸어 잠근 채 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는데 눈앞의 웬 조작버튼들은 어디서 보긴 했어도 제대로 배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갈래길에서 나오는 표지판과 신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달리는 열차를 어떻게든 주먹구구식으로 운전하고 있는 상태. 그럼에도 내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는 몇몇 사건들 때문에 '혹시 어쩌면 나는 대단한 사람인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슬쩍 내비치곤 하는 그런 상태.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주인공 K도 어쩌면 같은 생각을 했었을지도 모른다.


?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1FmP%2Fimage%2F_eZUxFsUVZa_qHBfMfYe04kmpT4.jpg
새퍼의 집에서 수상한 유골을 발견한 K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면 인조인간을 잡는 인조인간인 '블레이드 러너' K가 등장하는데, K는 어떤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보이트-캄프 시험'이라고 불리는 복종 테스트를 받으며 인조인간으로 적합한지 항상 윗선에 확인을 받는다.


어린 시절을 거쳐 성장한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레플리칸트는 날 때부터 '제조된' 성인인 까닭에 인간 사회를 경험하며 쌓는 추억이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인지가 떨어진다. 즉, 자아의 주체성이 결여돼 있다. K가 사건을 해결하고 경찰서에 복귀할 때마다 받는 문구들의 나열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불쾌하게 여기지만 인조인간들은 진짜 인간의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를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K 역시 테스트를 받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고, 자신이 인조인간이라는 걸(따라서 가해지는 차별이나 대우까지) 그럭저럭 받아들이며 산다.


하지만 K는, 자신에게 다소 이질적인 형태의 어릴 적 기억이 있다는 걸 안다. 갖고 있던 작은 목각 인형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작은 화로에 숨겨두었던 생생한 기억. 보통의 레플리칸트라면 정서적 안정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행복한 기억이 각인돼 있기 마련인데도 K는 자신의 기억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레플리칸트로 살아가지만 실은, 레플리칸트가 아닌 것 같은 기분.


?fname=http%3A%2F%2Ft1.daumcdn.net%2Fbrunch%2Fservice%2Fuser%2F1FmP%2Fimage%2FhrwVj-rEb3i0b0f-RFtWrFwCHEI.PNG
기준선 테스트를 받는 K


K의 의구심이 증폭되는 건 극의 초반부 K가 추적한 새퍼라는 인물이 언급했던 '태어난 레플리칸트가 있다'라는 말, 그리고 그의 농장에서 발견한 여러 단서들을 접할 때다. 미심쩍은 자신의 기억이 독특한 레플리칸트의 존재를 추적할 때마다 재생 버튼이라도 누른 듯이 번쩍이며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건 수사를 빌미로 그는 자기 기억의 출처를 찾아 나서게 되고, 결국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한 인간의 기억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아가 그 기억이라는 게 단순한 한 인간의 기억이 아니라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최초로 레플리칸트가 출산한 아이의 기억이라는 점에서 K는 자신이 평범한 레플리칸트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는다.


K의 애인인 조이는 그런 그가 역시 특별하다며 이름까지 지어주지만, 단지 구형이라는 이유로 처분될 레플리칸트를 잡는데도 혈안인 인간들이 출산이 가능한 레플리칸트의 흔적을 찾겠다고 한다면 어떨 것인가. K는 특별한 존재가 됐다는 기쁨보다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압도된 위압감과 공포감에 휩싸이고 만다. 이미 그 자신이 레플리칸트 사냥꾼이었으니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민경민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영화, 삶, 인간, '지적 감성인'들을 위한 사유 공간입니다.

1,806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83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나이가 들수록 주목해야 할 그 사람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