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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Nov 02. 2021

평화의 하늘빛, 물빛

여행×그곳 01 _오키나와 ‘요미탄’ 도자기 마을

여행×그곳 01 

오키나와 ‘요미탄’ 도자기 마을



<눈물이 주룩주룩(涙そうそう)>, <남쪽으로 튀어(サウスバウンド)>, <아오이 유우의 편지(ニライカナイからの手紙)>, <안경(めがね)>…. 이 중에서 한 편이라도 본 영화가 있다면 이미 당신은 오키나와의 물빛과 하늘빛에 젖은 적이 있다. 아무리 슬픈 장면도 오키나와의 물빛과 하늘빛을 배경 삼으면 칙칙하거나 어둡지 않다. ‘난쿠루나이사(なんくるないさ).’ 오키나와 말로 “괜찮아 잘 될 거야”라는 뜻. <눈물이 주룩주룩>에서 주인공이 해변에 오픈한 카페 이름이 바로 ‘난쿠루’다. 내내 관객의 눈물을 주룩주룩 흐르게 한 영화인데도.


오키나와는 아직 일본 속에 없다. 오히려 일본 밖, 어느 곳에 있다. 많은 오키나와 사람이 여전히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본 사람(야마톤츄) 또는 내지인(나이챠)과 구분해 ‘우치난츄’라고 자신들을 부른다. 1879년, 일본이 멸망시킨 류큐(琉球) 왕국이 아직도 그들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은 것은 태평양전쟁 때 오키나와 인구의 1/4이 희생당한 상처와 무관하지 않다. 오키나와 문화의 하나인 도예 역시 일본과 사뭇 다르다. 옥빛, 쪽빛으로 물든 오키나와 하늘과 바다가 흐르는 오키나와 도예를 찾아 요미탄 도자기 마을로 간다.



아열대의 하늘빛과 물빛이 흐르는 그릇


길을 걷는다. 마을길. 낯설지만 정겹다. 하늘은 저만큼 높아서 옥빛에 가까운 파란색이 아득히 길 끝까지 번져 있다. 거기에 때때로 느닷없이, 먹구름이 덧칠되기도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장엄하고 시원하다. 오름가마 처마 밑에서 비 오는 소리를 귀에 담는다. 어떤 교향곡보다 유려하고 아름다운 소리. 내리고 흔들리고 쏟아지고 흐른다. 그리고 마침내 웅덩이를 찾아 고인다. 비는 마침 교향곡의 한 악장 정도의 시간을 연주하고 멈춘다. 고인 물에 하늘이 담긴다. 그 작은 물빛으로도 눈부시다. 물기를 쏟은 하늘은 파랗게 농익는다. 또 비가 내린다면 아마 파란 빗줄기일 듯싶다.


다시 길을 걷는다. 이곳, 마을의 길 끝은 어디나 도자기가 가득한 집이다. 그 집들 속으로 하늘빛이 스며든다. 아직 유약도 바르지 않은 도자기들이 흙빛을 조금씩 누그러뜨리며 물기를 말리고 있다. 도자기는 물을 담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물이 새는 것은 질그릇 일지는 몰라도 아직 도자기는 아니다. 그래서 굽고 유약을 바르고 또 굽는다. 손톱으로 튕겨 팅, 하는 소리가 날 때 비로소 그 소리마저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된다.


가마를 돌아 다시 길을 걷는다. 길 끝 집. 유리문 옆, 언제 비가 내렸느냐는 듯 마른 우산이 무심히 꽂혀 있는 우산꽂이도 도자기다. 무늬 대신 동그란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우산꽂이. 거기 흙빛 속에 살짝 하늘빛이 비친다. 그러고 보니 이 마을의 그릇들은 모두 하늘을 닮았다. 길 끝에서 만난 하늘과 그릇은 물기를 머금었다 내뿜고 다시 담고. 도자기의 표면에 하늘빛과 물빛이 엷게 또, 진하게 흐른다.


오키나와 도공이 빚은 도자기가 아열대 하늘빛과 물빛을 바르고 마을 공방의 진열대에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다. 아직 바람밖에 담은 적이 없는 그릇들. 방문객의 선택을 받은 그릇은 길을 나설 것이다. 가깝거나 먼 길 끝, 낯선 집에 도착한 그릇은 거기에 커피, 가루녹차, 꽁치 따위의 이름을 가진 먹을거리를 담을 것이다. 오키나와의 바람을 비우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또 다른 바람을.


평화를 담는 그릇, 요미탄 도자기 마을


요미탄 야치문노 사토(読谷やちむんの里). 이곳에 도자기 마을이 생긴 때는 30년 전인 1981년. 오키나와 각지에 흩어져 작업하던 도예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공동 가마를 만들고 도예촌을 형성한다. 그때까지 이곳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의 불발탄을 처리하던 곳이었다. 죽음이 유보된 무시무시한 포탄이 쌓여 있던 곳. 죽음을 담지 못한 그릇이 즐비했던 이곳에 오름가마를 세우고 생명을 담을 그릇을 빚은 사람들.


도자기(陶瓷器)와 무기(武器). 모두 그릇을 뜻하는 한자가 들어간 단어. 하지만 하나는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담는 그릇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죽이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담는 그릇이다. 삶을 담는 그릇과 죽음을 담는 그릇, 평화를 담는 그릇과 전쟁을 담는 그릇. 결국 그릇은 거기에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삶과 죽음이 나뉘고, 전쟁과 평화가 선택된다.


너무나 모순돼 결코 하나일 수 없을 듯하지만 실은 이 두 가지를 자연스럽게 하나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다. 바로 사람이다. 사람이 때론 도자기를 빚고, 때론 무기를 만든다. 요미탄 도자기 마을은 죽음의 그릇을 삶의 그릇으로 바꾸려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바람을 담고 있는 평화의 그릇이다.


이곳 도예가의 가마와 작업실은 아열대의 자연 속에 산재해 있다. 이곳저곳 나무 사이로 보이는 붉은 기와집이 작업실과 가마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ㆍ판매하는 공방이다. 오키나와의 물빛과 하늘빛은 오키나와 유리공예에도 스며 있다. 오키나와 유리그릇에는 두 빛이 그대로 섞여 아름다운 빛을 낸다. 요미탄 도자기 마을의 초입에 있는 츄부키 유리공방 니지(宙吹ガラス工房虹)에는 하늘빛과 물빛을 섞어 마치 엿을 녹이듯 유리를 다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짙푸른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작업실, 공방, 가마의 지붕에 얹혀 있는 오키나와 기와는 붉다. 핏빛보다는 선홍빛에 가깝다. 선홍빛 암키와와 수키와는 넉넉히 바른 희디흰 회반죽으로 단단히 연결돼 있다.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고, 세찬 빗물도 가볍게 흘려보낼 희고 붉은 지붕. 오래전부터 오키나와 사람들을 안심시켜온 믿음직스러운 색. 오키나와의 보호색 아래에서 요미탄 도자기 마을의 도예가들은 평화를 담을 그릇을 빚고 있다. 오키나와 문화의 믿음직스러운 특색. 외지인의 눈에는 부드럽고, 느긋하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색. 흙으로 빚고 불에 굽는다는 점에서 기와와 도자기는 같은 핏줄, 같은 색이다. 붉은 지붕 위에서 액을 막아내는 사자 모양의 ‘시사(シ―サ―)’ 역시 같은 핏줄이다.


생활을 담는 그릇, 오키나와 도예


오키나와에는 도자기, 유리공예와 관련된 곳이 대략 세 곳 정도 된다. 나하(那覇) 시내, 국제거리 근처의 ‘쓰보야(壺屋) 도자기 거리’, 이토만 시의 ‘류큐 유리 마을’ 그리고 요미탄손의 ‘요미탄 도자기 마을’. 물론 세 곳 모두 관광지로 유명해 일본 본토(이런 표현으로도 일본 속 오키나와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다)나 한국, 중국 등 외국에서 온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이곳 이외에도 오키나와 도예가의 작업장이 많겠지만 연구 등 특별한 목적으로 방문하지 않는 이상 그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쓰보야 도자기 거리는 오키나와 도예의 역사를 간직한 쓰보야야키(壺屋焼)의 발생지다. 17세기 초, 오키나와가 일본의 현이 아닌 독립된 류큐 왕국이었을 때, 세자의 초청으로 조선인 도공이 건너와 유약을 바르는 조선식 도예법을 전한 뒤 오키나와의 도예는 독창적인 발전을 한다. 그 역사의 현장이 바로 쓰보야 도자기 거리에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에서 도자기를 굽지 않는다. 도심의 하늘은 장작을 때는 가마의 검은 연기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불을 피우지 않는 오름가마와 쓰보야 도자기 박물관 그리고 여러 공방이 있어 오키나와 도자기의 역사를 보여줄 뿐이다. 그곳을 지키던 대부분의 도예가는 요미탄 도자기 마을로 이주했다.


오키나와의 도예는 미술품이나 차도구가 아닌 음식을 담는 생활 도자기가 주종이다. 지금도 이런 전통은 이어지고 있는데, 이는 도예가 가네 지로(金城次郎)의 고집스러운 작업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고집은 일본의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류큐 도기 기능보유자(일본에서는 이를 흔히, ‘인간국보’라 한다)로 인정받는다. 아열대 물빛의 오키나와 도자기에 그는 옥빛 바닷속을 유영하는 물고기를 새겨 넣는다.


요미탄 도자기 마을에는 ‘지로가마’가 있다. 그 가마를 중심으로 카네 지로 일가의 도예 작업실이 있다. 장남, 차남, 장녀, 손자, 손녀 등이 황금성[金城]을 쌓고 오키나와의 물빛과 하늘빛을 도자기에 담고, 물고기를 그려 넣어 오키나와 도예의 맥을 잇고 있다. 카네 지로는 2004년 영면에 들어 ‘물고기’를 타고 바다 건너 ‘니라이카나이’로 갔다.


오키나와의 물빛과 하늘빛이 만나는 곳, 니라이카나이


니라이카나이(二ライカナイ)는 오키나와 말로 ‘바다 저편에 있는 뿌리의 나라’다. 오키나와 사람이 죽으면 가는 나라, 그래서 그곳의 영혼들이 현실의 풍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니라이카나이. 그곳은 오키나와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나라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고단한 삶 너머의 이상향이다. 바다 건너 물빛과 하늘빛이 만나는 곳, 니라이카나이가 마음속에 있기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고단한 삶을 헤쳐 나가면서도 느긋하고 밝은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도 개봉된 일본 영화, <아오이 유우의 편지>의 원제는 ‘니라이카나이에서 온 편지(二ライカナイからの手紙)’다. 불치병으로 일찍 죽은 어머니가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매년 생일 편지를 보낸다는 이야기. 어머니는 정말 니라이카나이에서 편지를 보내 딸의 행복과 안녕을 빌었을까. 아무튼, 스크린 속에서도 오키나와의 물빛과 하늘빛은 부드럽고 느긋하게 만나 아름답고 따뜻한 빛을 만들었다.


다시 길을 걷는다. 하늘에 먹구름이 덧칠된다. 하지만 오키나와에서는 먹구름조차 어둡지 않다. 단지 하늘빛을 잔뜩 머금어 짙은 쪽빛을 띨 뿐이다. 저 먹구름이 터져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에 젖고 싶다. 오키나와의 하늘빛과 물빛이 흐르는 몸. 어느새 손에는 공방에서 구입한 에스프레소 잔과 다완, 그리고 유약을 바르지 않고 거칠게 굽는 아라야치(荒燒)식의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카누 모양의 도기가 들려 있다. 터질 듯 잔뜩 부풀어 짙은 쪽빛 하늘. 그 아래로 천천히 걷는다. 바람이 분다. 빗방울,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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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Zg8B1n0F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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