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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Nov 07. 2021

홀로 모닥불을 피우는

음악×문예 06 _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음악×문예 06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지만 도시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보기 여간 쉽지 않다. 현대인의 일상이 바쁘기도 할뿐더러, 밤새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하늘을 올려다봐야 할 일이 있을까. 밤하늘은 너무 밝아 그나마 빛을 내는 별도 아스라할 뿐이다. 그나마 팬데믹의 밤은 불야성 같던 거리의 조도를 많이 낮추었고, 밤늦게까지 거리를 떠돌던 발걸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를 두며 공원과 집 근처 숲으로 옮겨 가게 된다. 마침, 계절은 바뀌고 있고, 이런 밤이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을 수 없다. 별빛 성근 도시의 밤이지만 몇 안 되는 그 빛을 찾게 된다. 살갗에 닿는 쌀쌀한 바람과 귓불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눈을 반짝이게 하는 밤하늘. 계절은 이렇게 밤도둑처럼 공감각으로 온다.


별은 사람들에게서 아주 멀리 있다. 광속 우주선에 몸을 실어 한 생애를 다 보내고 다가간다 해도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들이 부지기수이다. 지금 밤에 보이는 대부분의 별은 그 별을 보는 사람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의 모습이다. 이미 우주에서 사라진 별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빛나고 있을지 모른다. 아주 오래된 반짝임, 여기 있으나 거기에는 없는 빛. 어디에나 있고, 또 아무 데도 없는.



사랑은 터치, 느낌이 최고


별뿐만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과거와 눈을 맞추고 있다. 과학은 그렇게 말한다. 실체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미래에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떤 사물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이미 지난 저것이다’는 생각.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의 그라는 생각에 이르면 차라리 눈을 감는 게 낫다. 그래야 더 그를 느낄 수 있다. 느낌은 눈보다 실시간에 가까우니. 그래서 존 레넌(John Lennon)의 노래 <Love>의 가사에는 “Love is Watching”이나 “Love is Seeing”이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밀고 나가면 결국 사랑은 ‘터치’일 때 그것도 눈과 눈 사이의 간격이 0에 수렴되는 전면적 접촉일 때 두 사람은 온전히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공간은 같은 공간인데 시간의 틈은 미세하게 벌어져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했다’가 될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손에 손 잡’을 수 없는 노릇, 그래서 지금 바로 여기의 그를 상상하며 ‘필링’할 수밖에 없다. 모리스 앨버트(Morris Albert)는 그래서 “느낌이 최고(Nothing More Than Feeling)”라고 강력하게 속삭였지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을 접고 다시 별을 본다. 별은 사람들에게 사실은, 너무 가깝다. 거리로는 그토록 멀리 있는 별이지만 지구인들의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별의별 이야기를 은유로써 담고 있다. ‘사람은 죽으면 별이 된다’는 이야기는 한 세대 전만 해도 세대를 이어주는 믿음의 은유였다. 말의 비중에서는 이미 은하계가 은하수를 대체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은유로 가득 차 있다. 은유의 보조관념으로서 별은, 순위로 따지자면 아마 몇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여전히 아이들은 ‘반짝반짝 작은 별’을 부르며 손바닥과 손등을 뒤집고, 사라졌던 별사탕과 뽑기(달고나)의 별은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며 불량한 달콤함을 소환한다. ‘별도 달도 따준다’는 맹세는 세대불문, 여전히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또한 ‘반짝인다고 모두 별은 아니지’ 하는 말로 깨달은 척할 수 있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누구나 별 하나 가슴에 품고’ 경쟁만이 유일한 공정인 사회를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 세기 7, 80년대를 약관으로 살아낸 이들이, 대개 별을 은유로서 배운 것은 국어 교과서 속에서일 것이다. 알퐁스 도데와 황순원의 「별」에 나오는 “저 많은 별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찬란한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구나” “하늘에 별이 돋아났다가 눈물 괸 아이의 눈에 내려왔다. […] 오른쪽 눈에 내려온 별이 돌아간 어머니라고 느끼면서” 하는 문장으로 별은 밤하늘의 항성이 아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가 된다. 교과서가 시시해지는 ‘삐딱한 나이’에 이르면 『어린 왕자』와 함께 소행성 B612호를 떠나 “사막이 아름다운 건 거기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는 폼 나는(?) 깨달음을 얻거나, 식민지 시대의 순수 청년 윤동주를 소환해,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세상에 “나의 별에도 봄이 오”기를 바라게 된다.


그즈음에 이르면 은유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데 ‘새벽’은 오랜 ‘밤’을 견딘 사람만이 맞을 수 있는 숭고한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소중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또 길을 나선다. 그 길을 안내해주는 많은 사람들 중에 정호승 시인이 있었다. 그의 시집 『서울의 예수』는 ‘밤’의 편에 선 은유들과 ‘새벽’의 편에 선 은유들이 서로 부대끼며 섞이고 버무려져 차곡차곡 쌓인 은유의 화석이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저문 바닷가”의 황량함에 가슴 저려하면서도 ‘어두운’ 시대의 사랑을 욕망하는 모습이 거기에 새겨져 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꽃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 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의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정호승,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전문

(정호승, 『서울의 예수』, 민음사, 1982)


함부로 꺼내 읽지 못했던 불온한 은유들은 그러나 지금은 격언처럼 상투적이고 속담처럼 진부하다. 결혼식 축가로서나 빛을 발하는  ‘ 그보다  세기 (1882) 니체가 스물한 살의 ‘ 살로메에게 건넨 첫마디, “우리가 어느 별에서 떨어졌기에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이후 이미  신선도는 다했는지도 모른다. ‘하늘 아래 새것 없다 말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은유의 소유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므로 누가 비슷한 표현을 썼다고 해서 문제  것은 없다. 곰삭은 은유와 신선한 은유,  중에 옳은 것은 없다. 다만 음식처럼 사람들이 취향에 따라 좋고 싫음이 드러날 따름이다.


그런데 그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집단일 때 은유는 집단성을 구체화하는 한두 가지의 관념으로만 수렴될 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비유의 확장, 즉 모호성은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지배 권력이든 저항 권력이든 차이가 없다. ‘밤’은 억압적 권력이며, ‘새벽’은 그 ‘밤’을 이겨내는 새로운 사회일 뿐이다. 이쯤 되면 은유는 그저 말놀이와 다를 바가 없다. 대립된 두 권력은 기본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내세운다.



은유의 폭력, 폭력의 은유


‘건강한’이란 수식어가 사람이나 유기체가 아닌 사회에 붙을 때 은유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사가 된다. 건강한 사회를 위해 ‘암적 존재’들은 잘라내야 하고 ‘바이러스 같은 생각’은 막아내고 박멸해야 한다. 느닷없이 암이 돼버린 사람들, 바이러스가 된 학자들이 사회로부터 추방되고 죽임을 당하는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한 사회를 유기체로 은유하는 순간 그 사회의 개개 구성원은 유무형의 집단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은유에는 이미 폭력이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이 준비되어 있다. 은유는 선택과 대치라는 과정을 거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음의 칼날’이라고 했을 때 칼날의 여러 속성 중 오로지 날카로움만이 칼이 아닌 마음으로 슬그머니 자리바꿈 한다. 은유가 완성된 자리에서 칼은 사라지고 칼날의 날카로운 이미지만이 마음을 구체화해주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언어는 원래 사물과 인과로 맺은 관계가 아니라 약속―제3자가 배제된 합의라는 폭력―으로 정한 기호이므로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그러므로 가지런한 언어는 권력의 웅변이고 뻔한 은유는 권력의 수사다.


언어적 의미에서든 쓰임새로든 은유는 타자를 대상화한다. ‘너는 나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선언. 그러므로 모든 은유는 풍경이다. 거리를 유지할 때 풍경 즉, 은유된 이미지는 아름답다. 타자의 모습이 소멸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대상은 멀수록 그 아름다움이 영롱하다. 마치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황량하고 비참하다. 그 모습에 동정심을 갖게 되고 그 동정심의 거리마저 없어지도록 더욱 가까이 가면 타자인 줄 알았던 풍경은 바로 자화상인 걸 알게 된다.


김혜순의 시 「풍경 중독자」에는 이와 같은 정황이 잘 표현되어 있다. “행복했어요 멀리서 바라보기엔/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참혹했어요”. 그 참혹한 자화상을 붙들고 같은 시공간을 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은유도 없이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동시에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영원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별 #사랑 #거리 #은유 #폭력 #우리가어느별에서 #풍경중독자


https://youtu.be/yY-Q29Xzb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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