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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Jan 26. 2022

다른 한 통의 사랑 편지

리뷰×리뷰 01 _시인의 시인, 오규원

리뷰×리뷰 01 _시인의 시인, 오규원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순례’는 지극히 서구적인 개념이다. 행위가 아닌 개념. 이에 견줘 비서구적 개념을 굳이 찾는다면 ‘노마드’ 즉, 유목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개념으로서 ‘노마드’는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서구인이 생각하는 동양적인 것, 오리엔탈리즘으로 형성된 노마드적 삶이란 실재의 유목민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것처럼 아시아인이 상상하는 순례 역시 허상일지 모른다.


1

들은 길을 모두 구부린다

도식주의자가 못 되는 이 들[平野]이

몸을 풀어

나도 길처럼 구부러진다


2

종일

바람에 귀를 갈고 있는 풀잎

길은 늘 두려운 이마를 열고

나를 멈춘 자리에 다시

웅크린 이슬로 여물게 한다


모든 길은 막막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고개를 넘으면

전신이 우는 들이 보이고

지워진 길을 인도하는 풀이 보이고

들이 기르는 한 사내의

편애와 죽음을 지나


먼 길의 귀 속으로 한 발자국씩

떨며 들어가는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보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3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숲이 깊을수록 길을 지워버리는 들에서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몸이 작은 새의 긴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고

길을 구부리고 지우고

그리고 무엇인가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저 무엇인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순례 序」* 전문

*오규원, 『순례』, 문학동네, 1997. [민음사판(1973) 복간본]


그럼에도 ‘순례’는 길을 만든다. 구부러진 길, 들판과 산이 몸을 풀어 만든 길에 ‘나’의 순례가 얹힌다. 지나온 길은 지워지고 “먼 길의 귀 속으로” 들어가는 길 위의 삶, “영원히 집이 없을 사람들”이 순례와 노마드의 길에서 만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이 멈춘 자리에서 길은 끝나고 죽음은 유목민의 집이 된다. 삶이었던 길은 집이 생기면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왜 사냐”고 묻지 마시길. 이 물음은 곧 “왜 죽지 않니”와 같으므로. 길 끝에 죽음이 있다고 그 길 위에 멈춰 서면, 그곳이 바로 길 끝임을 걷는 자는 안다. 그러므로 부는 바람에도 삶의 핑계, 또는 이유가 생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 또는 패러디한 이 문장은 쉼표와 쉼표 없음으로 반복된다. 그것은 반복이면서, 또한 반복이 아니다. 순례도, 유목도 결국 길 위의 삶이지만 모든 삶이 같을 수 없다.


같은 말, 같은 문장이지만 시는 쉼표 하나로 다른 문장을 만든다. 그렇듯,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무리 깊어도 이 순간 결국, 바람이 불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살려고 애쓰다 보면 살아가거나 살아진다. 그것이 사람 아닐까. ‘사람’에서 중복된 모음 하나를 버리면 ‘삶’이 된다. 그리고 쉼표 하나, 모음 하나를 넣거나 빼는 일에 골몰하는 사람, 시인이 있다.



모두 반짝,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길을 가다가 무의식적으로 발에 밟히는 보도블록을 셀 때가 있다. 어떤 목적도 없이 의미도 없이 보도블록을 세다 보면 머릿속 복잡한 생각이 흩어진다. 이럴 때, 그 발걸음은 오롯이 산책(散策)이 된다. 계산하고 따지는 생각을 흩어버리는 일. 그러므로 산책은 걷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생각을 놓아버리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다만, 머릿속 생각은 아무리 떨치려 해도 자꾸 순번이 정해지고, 인과가 맺어진다. 그래서 걷는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흩어버리기 위해 산책은 곧 걷는 것으로 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아무리 유유자적 걸어도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뭔가 처세를 생각한다면 그건 산책이라 할 수 없다. 집책(集策)이 되어 집착(執着)할 뿐이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러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 × ↓ ↓ ↓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꼴로 놓인 보도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 전문

*오규원,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 문학과지성사, 1995.


IMF 사태 이후, 은행 통폐합(자본의 집착?)으로 지금은 신한은행이 되고 국민은행이 된 대방동의 두 은행 사이를 걷는 시의 화자는 자신의 시선을 극도로 차단한다. 화자의 눈은 오로지 기록을 위한 기계로만 쓰인다. 사실적 묘사에 감춰진 화자의 시선은 대개 대상의 선택으로 발휘되지만 이 시에서는 그 선택마저 무화하려고 애쓴다. 물론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이보다 무수한 ‘것’이 있겠지만 화자는 이 시에서 제시한 ‘것’은 시선을 배제하고, 즉 어떤 의미나 생각을 기준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 없는 ‘것’이 나열되고 병치된 날것 그대로의 사물이다.


오규원 시인의 ‘날이미지시’에서의 ‘날이미지’는 흔히 오해하듯이 사실 그대로의 이미지, 보이는 대로의 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시의 이미지는 대개 화자의 시선이 개입된다. 아무리 객관적‧사실적 묘사라도 그것은 시선에 의해 선택된 대상이므로 필연적으로 배제되거나 지워진 대상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날이미지는 그것조차 넘어서려는 시적 시도다. 인간적 시선, 즉 관점으로 전취된 풍경에 대한 반성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성찰이 날이미지 시론의 핵심이다.


역설적이게도 의미를 지향하는 이미지가 오규원의 날이미지 시론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주체에 의해 규정된 의미가 아니라 주체에 반하는, 그러니까 반주체적 의미다. 그래서 날이미지에는 ‘사실적 날이미지’ ‘발견적 날이미지’ ‘직관적 날이미지’ ‘환상적 날이미지’로 이미지의 성격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날것이고 살아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 위에 발견되고 직관된, 환상적인 의미가 더해진다. 그러므로 무의미시처럼 의미를 없앤, ‘무의미의 의미’라는 주체의 시선이 아니라 의미를 발견하는 반주체의 시선인 것이다.


산책을 하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세어보면 알쏭달쏭한 날이미지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계산과 책략을 놓아버리고 흩어버리는 순간 보이는(‘찾은’이 아닌) 사물을 하나둘 세어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의미! 그때의 생각이 바로 날이미지인 것이다. 어떤 의미와 생각으로 사물을 선택하고 은유하는 것이 아닌. 수영을 하다가 숨 가쁜 고비를 넘긴 뒤 찾아오는 호흡과 동작에서 가끔 듣는 돌고래의 울음소리…… 그때 발견한 날이미지는 그 울음소리였다.



어둠이 어두운 게 아니라, 어두운 게 어둠


오규원 전집을 뒤적이다가 느닷없이 이 시가 눈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딱 꼬집어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시 같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여전히 아름다운 시가 넘쳐 나는 시대, 낭만의 시대를 넘지 못하는 환경에서 이 시가 1981년에 발간된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놀랍다. 시가 쓰인 때는 아마 그해보다 전일 테니 어쩌면 70년대의 시일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인.’ 오규원 시인을 칭할 때, 이렇게 부르는 데 주저할 후배 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시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현대시작법』의 저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시가 다분히 메타적인 성격(‘시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담고 있는)이 짙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모든 시는 메타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그의 시만큼 그러한 성격이 짙은 시도 드물다. 그 이유는 아마, 여전히 시에서 위안을 찾고, 삶의 깨달음을 얻으려는 도도한 낭만의 시대에 반목하며, 시의 영역을 넓히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1

어둠이 내 코 앞, 내 눈 앞에 있다.

어둠은 역시 자세히 봐도 어둡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나를 욕한다.

그러나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어둠을 자세히 보면 어둠의 코도 역시 어둡고

눈도 귀도 어둡다.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스스로 어둠이 되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거리를 두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어둠이 어두운 게 아니라

어두운 게 어둠이라는 사실이다


2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모든 것은 어둠이다.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꽃도 사랑도 청춘도 어둠이고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태양도 어둠이다

그러니까 어두운 것으로 뭉친 어둠은 어둡지 않은 날 봐도 역시 어둡다.


3

어둠이 어두운 것이라면, 만약 어둠이 어두운 것이라면,

그러므로 결국 어둠 외에는 어두운 게 아니다

라는 확신을 가져도 좋다고 친절히 내가 말해도

사람들은 나더러 말장난한다고 말한다.

―「어둠은 자세히 봐도 어둡다」* 전문

*오규원,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1981, 문학과지성사.


어둠은 현실이나 삶의 은유가 아니라, “어둠은 어두운 것이”고 “결국 어둠 외에는 어두운 게 아니다/ 라는 확신을 가져도 좋다고 친절히” 이 시의 화자는 말하지만 어둠을 비유로 쓰는 “사람들은” 화자에게 “말장난한다고 말한다.” 말장난이 시가 되는 순간이고, 은유가 부정되는 순간이다. 그럴 때, “어둠이 어두운 게 아니라/ 어두운 게 어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모든 것은 어둠이”고, “어두운 날 본 꽃도 사랑도 청춘도” 심지어 “어두운 날 본 태양도 어둠이다”.


이때 비로소 이미지에서 의미가 배어 나온다. 오규원 시인의 ‘날이미지 시론’은 이를 말한다. 물론 이 시를 쓴 때보다 더 뒤에 시인은 『날이미지와 시』(문학과지성사, 2005)를 내놓지만, 이미 이때부터 ‘날이미지’의 씨앗이 그의 시에 심겨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은유는 의미에 맞춰 대상을 선택하지만, 은유를 넘어서는 이미지는 날것 그대로 직관적으로 선택되어 의미를 파생한다. 즉, 의미보다 이미지가 먼저인 것이다. ‘어둠은 어둠이다’라는 결코 은유가 될 수 없는 이미지에서 “태양도 어둠”이라는 의미가 배어 나온다. 굳이 의미라 이름 붙인, 은유가 아닌, 날이미지의 의미. “어둠은 어둠”이라는 당연한 말을 남기고 어둠 속에 영원히 잠든 시인은 온전한 어둠이 되었을까? 어떤 어둠도 아닌, 어둠이 어둠인 어둠. 그 속의 시인도 어둠인 어둠.



그 손은 그렇다, 언어이리라


오규원 시인이 41년생, 김현 선생이 42년생으로 한 살 터울이고, 김현 선생이 1962년 『자유문학』으로, 오규원 시인이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저승이 있다면 두 사람은 지상에서처럼 사후에도 시인과 평론가를 넘어서는 친분을 나눴을 것이다. 오규원 시인의 두 시는, 모두 ‘김현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하지만 시 속에는 어디에도 김현 선생이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선생의 어떤 흔적도 그림자도 없다. 다만, 서로 간에 전해 가고 전해 오는 어떤 교감이 있을 것이다. 두 사람만 아는 행간의 이야기, 또는 이미지.


개울가에서 한 여자가 피 묻은

자식의 옷을 헹구고 있다 물살에

더운 바람이 겹겹 낀다 옷을

다 헹구고 난 여자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물을 가르며

달의 물때를 벗긴다

몸을 씻긴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 손으로

돼지 죽을 쑤고 장독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장맛을 보고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는

사내의 그것을 만진다 그 손은

그렇다 ― 언어이리라

―「손―김현에게」* 전문

*오규원,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1991.


武陵(무릉)에는 네거리에 사람이 없는 검문소가 하나 있다

안과 밖으로 검문은 스스로 행해야 한다

오른쪽은 절과 심산으로 가는 길이다

왼쪽은 강으로 이어진 길이며

앞은 논밭과 약초를 기르는 사람들의 길이다

우리가 무릉으로 들어온

뒤는 酒泉(주천)을 건너는 다리이다

오른쪽의 길에는 길 양편으로 각각 가게가 있다

목을 축이고 싶은 사람은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있다

오른쪽의 끝은 우체국이므로 심산에 가기 전에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 들러도 된다

왼쪽은 잡풀 우거진 들판이 강으로 가는 길을 만든다

앞은 느티나무가 다섯 가구를 모으고 있는 넓은 경작지이다

논에는 벼가 밭에는 인삼과 다른 약초가 무성하다

논에는 벼가 밭에는 인삼과 다른 약초가 무성하다

우리가 들어온 주천을 건너준 다리는

이 무릉의 유일한 입구이다


무릉은 사람이 지키지 않는 검문소가 있는

네거리의 전후좌우에 있다

아직은 열한 가구가 산다

나는 지금 낚시 가방을 들고 강변에 있다

비가 온 뒤라 흙탕의 강물이 많이 불었다

―「무릉―다시, 김현에게」* 전문

*오규원,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 문학과지성사, 1995.


중층적 비유로 언어를 묘사한 「손」과 무릉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무릉」에서 시인은 언어에 대해,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무릉」에서 시를 읽는 사람은 ‘무릉도원'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적 묘사가 파생하는 시적 의미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시인이 그것을 염두에 두었든 그렇지 않든. 모든 시가 그렇지만, 오규원 시인의 시는 특히 메타적이다. 메타성을 의식한 시작이 시의 곳곳에 숨어 있다. 그의 시론인 ‘날이미지 시적 묘사가 갖는 한계,  동일성의 시가 어쩔  없이 갖는 대상화를 뛰어넘는다.


사실적 묘사든 감각적 묘사든 비유적 묘사든 묘사는 동일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현대시는 이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거나 거리 두기이다. 이와 같은 현대시의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날이미지’ 시론은 그런 의미에서 현재진행형이다. 한 시인의 시 세계를 넘어서는 실험이 또 다른 시인의 시 세계에서 그 시인의 스타일로 형성되고 있고, 또 그럴 것이다. 「무릉」은 바로 이곳이며, 또 저곳이다. “다시, 김현에게”라는 부제가 없다면, 아마 「무릉」은 이곳의 시일 것이다. 그렇게 생전의 오규원 시인은 먼저 떠난 친구를 그리워한 것이다. 시인의 방식으로.


내가 머물고 있는 무릉(武陵)은 도원(桃源)의 입구에 있다(상징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그렇다). 그리고 이곳 외딴 슬래브집은 남향의 뜰을 끼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주천(酒泉)의 강에 붙어 있다. 강변에 붙어 있으므로 집은 언제나 맹목에 가까운 적막을 안고 있다. 그 적막은 어느 강변의 집에 가보아도 그곳에 있는, 머물고 있는 것들이 흐르면서 사라지는 것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체감하는 강변에의 비극적 정서이다. 이 집은 서쪽으로 흐르는 강물 곁이어서 그 적막이 더 두텁다.*

*오규원, 「외딴집—무릉日記(1)」, 『가슴이 붉은 딱새』, 문학동네, 1996, 9쪽.



죽음은 생각한다, 건강이 제일이지


자연사, 또는 자연재해가 대부분 죽음의 원인이던 시대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 옛날이 돼버렸다. 모던이든 포스트모던이든 오늘날 죽음의 원인은 문명적(?)이다. 평균수명은 근대 이전의 2배 이상 늘었고 죽음의 형태는 사람만큼 다양해졌다. 사고사, 과로사, 돌연사…….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의 자리에는 근대의 문명적 학살(?)이 자리한다. 학살의 역사, 사회적 고통의 시간을 외면하면서 마음의 안위를 찾는 데는 서정시만큼 적당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이후에 더 이상 서정시를 쓸 수 없다고 어떤 시인은 고백했을 것이다. 서정시밖에 쓸 수 없다면, 학살의 역사를 정면으로 뚫고 지나는 데는 서정시를 버릴 수밖에 없음을, 침묵만이 가장 시다운 것임을, 학살을 목도한 시인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학살이 학살을 낳듯, 고통이 고통을 낳듯, 서정은 서정을 낳을 수밖에 없기에.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잔하기로 했다


생각해보기 전에 우선 한잔하고

한잔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잔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전문

*오규원,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죽음이 건강을 걱정하는 아이러니! 오규원의 이 시는 그저 아이러니라는 장치가 있는 시일 뿐일까? 그렇다면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뇌물 받은 정치인은 어떤가? 또, 공교육의 일익을 담당할 선생님이 되기 위해, 사교육 시장에서 사대와 교대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어떤가? 내 아이들의 안전한 미래를 위해 다른 아이들의 죽음을 계기로 사회안전망을 확보해야 한다는 부모는 어떤가? 이에 견주면 죽음이 건강을 걱정하는 오규원의 시가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현실은 시보다 더 아이러니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아우슈비츠 이후, 4·3 이후, 광주 이후, 세월호 이후, 탄식과 애도마저 살아남았다는 안도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 안도의 순간에 탄식과 애도, 치유의 이름으로 서정은 피어난다.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며, 상처에 도포하듯, 안녕을 묻기보다 상처를 잊게 하는 시, 서정은 짐짓, 삶의 깨달음을 얻는 모습으로 시 속에서 매일 부활한다. 그 부활은 예수의 부활에 비견된다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실상은 좀비의 부활과 닮아 있다. 서정시는 아픔을 덮는다. 그러다가 아픔이 더 이상 서정으로도 마취되지 않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학살이라는 모르핀이 주사된다. 고통으로써 고통을 잊는 고통의 되풀이.


학살의 언덕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학살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때의 핏빛 하늘은 얼마나 서정적인가. 그를 돌려세워 왜 비서정적으로 안녕을 묻지 않는가, 요구하지 않는가. 이유는 이럴지도 모른다. 그의 뒷모습이 바로 나의 욕망이고 서정이어서가 아닐까. 욕망의 표현이, 마디 뚝뚝 끊어진 서정이 얼마나 기막힌 절창인가. 하지만 죄책감은 말이 없다. 안녕을 묻지 못한다면, 그저 침묵할 뿐이다. 이때 침묵은 유일한 시적 표현이다. 죽음이 걱정하는 건강만이 구원인 세상,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아우슈비츠와 4·3과 광주와 세월호…… 이후에도 반복될 고통의 시간에.



사랑하는 애인에게 사주고 싶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 그 자체를 줄 수 없어 인간은 사랑과 같은(절대 같지 않다!) 물건을 선물한다. 사랑을 담아서, 사랑이라고 여기며, 사랑이라고 우기며. 심지어는 밤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수 있다고 장담한다. 사랑은 증명하기도 어려운데, 밤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증명하기 어려운 은유의 소용돌이(아, 이 은유는 또 뭔가!)에 사랑을 뒤섞는 것인지. 하지만 사랑은 원래 그런 것. 모르는 사랑을 주려니 사랑과 등가적이라고 생각되는 물건을 선물하려는 것이다.


결국, 별을 따줄 수 있다는 장담은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반복된다. 사랑하는 애인도 밤하늘의 별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 말을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태초의 말처럼 여긴다. 하지만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처음 뱉은 그 말. “너도 사과 먹어” 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광고한다. 그 사랑의 증표들. 시장에 백화점에 쇼핑센터에 온라인 쇼핑몰에 넘쳐난다.


나는 사주고 싶네 사랑하는 애인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스판덱스 브래지어, 사고 싶네 아폴리네르 같은 팬티스타킹, 아 소포로 한 짐 보내고 싶네 에밀리 디킨슨의 하얀 목덜미 같은 생리대 뉴 후리덤


‘황혼의 하늘을 따라

중이 평화롭게 삼종 기도를 올린다

망명적이며 계모 같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풍모로서’

지저분하게 다가서는 일요일

나도 지저분하게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풍모로서

라포르그의 시를 베끼고

주일의 복음으로


골드만 같은 여의도

귄터 그라스 같은

카프카 같은

쇼핑 센터에서


나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사주고 싶네 하이네 같은 쌍방울표 메리야스, 워즈워스 같은 일곱 색 간지러운 삼각 팬티, 아 나는 등기 소포로 보내고 싶네 바스카 포파의 <작은 상자>에 든 월계관표 콘돔


지친 뒤 늘 혼자

한잔의 술에 취해 서쪽

하늘의 능선에다 번번이 토악질을

벌겋게 한 뒤 주저앉는 태양이여

안심하라 우리들 인간도 밥에 취해

주저앉기는 마찬가지 어떻든

쉬는 것은 일요일의 복음이고

취하는 것은 인생의 복음이고

나는 지금 쇼핑 센터를 돌며

오징어 다리를 잔인하도록 유쾌하게 찢어

씹는다 가로등이

주둥이 밑으로 찝찝한

타액을 조금씩 양을 늘려

흘리기 시작할 때

―「시인 구보씨의 일일 3―쇼핑 센터에서」* 전문

*오규원,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식민지 경성에서 소설가 구보 씨가 써내려간 ‘고현학’이다(고고학이 아닌). 오규원 시인은 80년대 중후반, 서울의 쇼핑센터에서 때마침 3저 호황에 들어선 한국 자본주의의 중심에서 박태원의 소설을 패러디해 「시인 구보씨의 일일」을 연작을 쓰고 있다. “취하는 것은 인생의 복음”일 뿐인 시대, “쇼핑 센터를 돌며/ 오징어 다리를 잔인하도록 유쾌하게 찢어/ 씹”으며.


사랑을 가시화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에 더해 경제력 격차까지 겹친 현실. 그러니 내 사랑의 등가물이 비록 따줄 수 없는 밤하늘의 별일지라도 좌절하지 말자. “릴케 같은 스판덱스 브래지어” 역시 사랑을 담기에는 부족하니까. 어차피 사랑과 표현이 서로 합치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잔인하도록 유쾌한” 세상이므로. 시인 구보 씨처럼 다짐만 하자, 무엇 무엇을 사주고 싶다고. 희망은 가깝고 돈은 멀고 증명은 어려우므로.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오규원 시인의 시는 메타적이다. 어느 시가 그렇지 않을까? 모든 시는 ‘사랑시’고, ‘풍자시’며, ‘메타시’다. 그럼에도 오규원 시인의 시는 메타적이다. 시가 무엇인지를 고민케, 생각게 하는 시. 그래서 그의 시는 일반 독자보다 시를 공부하거나 쓰는 독자에게 더 읽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시가 돼버린 시보다 시가 되려는 시, 그 범주를 확장하는 시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하는.


노점의 빈 의자를 그냥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노점을 지키는 저 여자를

버스를 타려고 뛰는 저 남자의

엉덩이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내가 무거워

시가 무거워 배운

작시법을 버리고

버스 정거장에서 견딘다


경찰의 불심 검문에 내미는

내 주민등록증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주민등록증 번호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안 된다면 안 되는 모두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어리석은 독자를

배반하는 방법을

오늘도 궁리하고 있다

내가 버스를 기다리며

오지 않는 버스를

시라고 하면 안 되나

시를 모르는 사람들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 되나

—「버스 정거장에서」* 전문

*오규원,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버스 정거장”이, “빈 의자”가, “주민등록증”이,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이 시가 되려면 시는 배반을 알아야 한다. 그 배반으로 시의 범주는 확장된다. 그러면 시였던 것은 노래가 되고, 잠언이 되고, 인생 지침서가 되고, 깨달음이 되고, 심지어는 ‘꼰대의 말씀’이 된다. 그러므로 시였던 시는 더 이상 시가 아니다.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알”기에 “시가 배반을” 아는 순간, 그때까지 시였던 것은 시가 아니게 된다. 지금 내가 읽고/쓰고 있는 시는 시였던 시인가, 시가 되려는, 아직 시 아닌 시인가?



너도밤나무도 모르게, 나무 속에서 자본다


2007년 2월 2일, 오규원 시인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난다. 시인은 흘러가는 시간에서 내려, 나무 곁에 묻힌다. 나무의 자양분으로 나무 속에 들어 시간을 무화시킨다. 마침내 “그해의 마지막 획득처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몇 소절을” 듣는다. 시인의 날은, 나무 속에 잠든 날조차 “음성들이 외롭게 나의 외곽에 떨어지는/ 따스한 겨울날”이다.


1

나의 음성들이 외롭게 나의 외곽에 떨어지는

따스한 겨울날.

골격뿐인 서쪽 숲의 나무들이

환각에 젖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있다.

떡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

너도밤나무도 모르게

동쪽과 서쪽 사이에 이론이 생기고

어쩌다가 잠 깬 시간이

머리를 갸웃거리곤 했다.

심심한 바람은 공간에 먼지를 쌓고

십칠세기 외투를 입은 산비둘기는

그해의 마지막 획득처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몇 소절을 울었다.


2

순례를 마친 나무들이

가만히 지층으로 뿌리를 뻗는다.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오고

山幕(산막)에 잠긴 목신이 기침을 한다.

관목숲에서 확대경을 끼고

밤의 배경을 뒤지는 달빛.

마을은

자물쇠를 튼튼하게 채우고

후방의 스산한 가장무도회에 떠났다.

단수로 남은 家僕(가복)들을

흔드는, 흔드는 등피.

태아들은 혼례가를 부르며 밤마다 숲으로 간다.


―「서쪽 숲의 나무들」* 전문

*오규원, 『분명한 사건』, 문학과지성사, 2017.[한림출판사판(1971) 복간]


추상 언어, 개념어가 시인의 세계인 서쪽, 감각의 숲속에 끌려와서 구체적 정황 속에 던져진다. 그곳에서 언어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이미지화된다.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던 ‘이론’도 ‘시간’도 ‘공간’도 “골격뿐인 서쪽 숲의 나무” 사이에 놓이면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공간은 나무와 나무가 시작과 끝을 만들어줄 때 비로소 그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동쪽과 서쪽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야 비로소 이론이 생긴다. 시인의 숲속 세계에서는 시간도 몸을 얻는다. 몸을 가진 시간은 잠도 잔다. 이론의 기척에 잠 깨 머리를 갸웃거린다.


시인의 세계, 환각의 숲속에서는 나무도 순례를 떠난다. 순례에서 돌아온 나무들이 지층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쉬려는 이유. 기침하는 목신과 어두운 숲 속을 뒤지는 달빛을 배경으로 마을은 가장무도회에 가고 없다. “태아들은 혼례가를 부르며 밤마다 숲으로 간다.” 그 ‘혼례가’는 차이콥스키의 교향곡과 섞여 불협의 화음을 만들지 모른다. 아니, 사실은 원래 두 곡이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서쪽 숲의 나무들」은 오규원 시인의 첫 시집 제일 앞에 수록된 시다. 서른 즈음의 오규원. 이미 그때 시인은 숲속에서 세계를 직관한다. 그리고 생을 마무리한 시인은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 영면 중이다. 거기, 나무 속에서 또 어떤 시를 구상 중일까? 시간이 무화된 그곳의 ‘날이미지’는 어떤 모습일까? 꽃 피고, 큰비 몰아치고, 나뭇잎 떨어지고, 눈 내리는 시간이 반복되어도 나무가 된 시인은 영원 속에서 잠들어 있다.


#오규원 #시인의시인 #날이미지시 #메타시


https://youtu.be/PtMvXblfd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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