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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Mar 03. 2022

섬들 사이로 해가 질 때

음악×문예 07 _박혜정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음악×문예 07

박혜정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섬들을 보고 왔다. 이른 아침의 바다. 밀물 속 섬들은 아득하게 멀고 언뜻 가깝다. 해가 등 뒤에서 막 떠올랐을 때, 그림자를 감춘 섬은 환하다. 윤슬이 반짝이는 바닷물 사이에서도 섬들은 어둡게 빛난다. 섬의 그림자는 반나절 동안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동안 바닷물은 섬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다시 들어온다. 섬과 섬 사이에 해가 자리 잡으면 하루는 붉게 사라질 준비를 한다.


온몸에 섬들의 움직임을 담고 싶었다. 해 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바람은 늘 바람으로만 남는다. 언제나 섬들보다 먼저 그림자를 거두고 일어나게 된다. 파도에 밀리는 발걸음보다 가벼운 몸은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들춰내는 기억 속에서 섬들은 온전히 하루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기억 속에서 꺼낸 바다의 풍경은 언제나 앵글이 같다. 방파제, 사구, 갯벌, 해안도로…. 바다를 보기 위해 머물던 곳은 여기저기인데 돌아와 펼친 풍경은 늘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본 바다, 수평선이 조금 아래인 바다. 거기 바다에 섬들은 이리저리 누워 있다. 그 사이에 고깃배들이 길을 내기도 하고 저녁 해가 잠자리를 준비하기도 한다. 상투적이기까지 한 이 풍경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딱히 이유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퍼즐 조각처럼 풍경은 나뉘어 있어 손을 대면 뒤죽박죽 섞여버린다.



해 지는 풍경으로 상처받지 않으리


섬들을 보고 온 날, 문득 노래 하나가 방 안에 가득 찬다. 어쩌면 평소에 하지 않던 낮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방은 유난히 넓어 보이고 문은 저 멀리 아득하다. 술잔 속 맥주 거품이 포말처럼 부서진다. 노래는 공간 속을 떠돌아다닌다. 남자 가수의 노래인데 울림은 여자의 목소리이다. 배뱅이굿인가? 그 여자의 얼굴이 참 창백하다고 느끼는 순간, 노래는 어제보다 넓어진 방에 익숙한 풍경 하나를 펼쳐놓는다.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 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로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박혜정,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전문


노래는 지금까지 맞추지 못한 퍼즐 조각을 차근차근 붙여나간다. 풍경이 방 안에 가득하다. 나는 이미 바닷가 언덕 위 적당한 자리에 앉아 있다. 저물녘의 서해와 섬들이 노을을 진하게 품고 있다. 창백한 얼굴에도 노을이 엷게 깔린다. 그 풍경에 취해 넋을 놓고 있는데 어떤 힘이 나를 흔든다. 몸이 흔들리자 고정되었던 앵글도 흔들린다. 풍경이 큰 파열음을 내고 부서진다. 풍경의 구멍, 큰 구멍 하나. 그 속으로 흔들리는 내 몸이 밀려 들어간다.


풍경 속에서 나는 스물 셋. 아니, 우리는 스물세 살. 우리들의 무리 속에는 신문이 펼쳐져 있다. 거기, 한 여대생의 자살을 놓고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무심히 던진다. 우리의 얼굴은 모두 냉소를 띠고 있다. 그녀는, 지금은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뀐 제3한강교에서 강물 위로 몸을 던진다. 삶조차 짐이 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소위 ‘엄혹한 시대’,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정의로움을 가장한 냉소에서 그렇게 그녀는 벗어났다. 또 한 사람이 희생됐고 ‘우리’는 냉소로써 그 제의(祭儀)에 동참했다.


흔들리는 시대였다. 사람도 세상도 권력조차도. 결연하고 굳건함만이 미덕인 시대. 그러나 누구도 어떤 것도 그렇지 못했던 시대. 시대는 지진계처럼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흔들리는 세상을 견디지 못하거나 자신의 몸으로 흔들리는 세상을 붙잡아 놓으려다 그들은 결국 흔들리는 삶을 놓아버렸다. 이제, 흔들림을 멈춘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우리들은 짐짓, 냉소를 보낸다. 우리 안의 흔들림을 혼신의 힘을 다해 밀어내려고 애쓰면서, 쓴웃음 짓는 입가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도 모른 채.


희생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겉으로 드러난 희생은 권력에 의해 가해진다. 특히 끝자락에 놓인 권력은 가해의 정도가 상상 이상이다. 그 폭력을 목도한 살아남은 자들은 희생된 자를 추모의 자리로 돌리고 선선히 사회 통합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희생된 이들은 사회 통합의 밑거름으로 모셔진다. 권력과 살아남은 자들이 함께 이들의 묘비명을 새긴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이들은 권력의 가해 세력 일부에게 죄를 묻고 그 기록을 함께 묻는다. 이로써 희생은 ‘거룩한’ 수식어를 얻고 사회 통합의 역사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또 하나의 희생은 기억에서 지움으로써 희생을 완성한다.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의 내부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묶인 ‘우리’ 속의 ‘나’는 묶인 끈을 풀고 ‘우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 끈은 너무 견고해서 자신을 부정하거나 무화시켜야 비로소 자유로운 ‘나’가 될 수 있다. 온갖 냉소를 등 뒤에 받고 일상 속으로 몸을 숨기거나 그조차 어려우면 몸을 던지는 방법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을 희생양이란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고 철저히 망각한다. 죽음의 기록은 있고 희생의 기억은 없다. 이로써 반권력의 도덕성은 유지된다.


‘우리’가 가해자이므로 드러난 가해자는 없다. 아무도 돌을 던지지 않았으므로 처음 돌을 던진 사람에게 책임을 덧씌울 수도 없다. 그 무리 속에 스물 셋의 내가 있다. ‘우리’ 속에 숨은…. 시대를 탓해도 결국 시대는 흘러가고 사람은 남는다. 그렇다면?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 기억 저편으로 밀어내는 것, 그리하여 세월을 핑계로 망각함으로써 희생제의의 공범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



지워진 서정, 서툰 아름다움


섬들을 보고 온 날, 지워진 줄 알았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노래도 함께. 그 노래는 그동안 내게 아름다움으로만 남아 있었다. 선율은 부드러웠고 정서는 편안했다. 노래가 주는 풍경도 상투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교묘하다. 나는 거기서 내 시선을 지우고 다른 시선으로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 시선은 내 시선이 아님을 변명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는 시선. 바닷가 언덕 위에서 내가 아닌 나는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희생을 목도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시는 야만의 다른 이름이기에. 하지만 희생 이후에 나는 비로소 시를 쓴다. 겨우 ‘우리’를 벗어나 ‘나’가 되어 시를 쓴다. 그러므로 서툴다. 서정을 지우려 하기에 더더욱 서툴다.


달콤한 은유는 이제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녀에게 돌려줘야 해


휴대전화 버튼의 별을 누르자 사랑니 두 개가 한꺼번에 빠졌다


신문을 읽는데 거기 아는 사람의 뒷모습이 지나간다


자작나무 숲속에서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았다


아버지는 오른쪽 구두끈을 묶지 않은 채 집을 나선다


광장 모퉁이에서 벌거벗은 사람들이 미동도 없이 서 있다


아침은 고요하고 지난 세기는 이제야 마무리 되고 있다


세상을 바꿀 노래를 부르는 그녀에게 박수를, 은유를 빼앗긴 우리는 썩은 이를 뽑고 (사람은 뽑지마) 거즈를 물고 아무 말 없이 (침묵은 결코 금이 아니지) 한동안 지혈을 해야 해 (피는 절대 피를 부르지 못하네) 해 지는 풍경으로 이제 상처 받지 않을 거야


노래가 모두 끝나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장미를 심어야 해


여름 꽃밭에 내리는 비는 땅에 스미지 않고


은유가 빠져나간 자리, 조금씩 물이 차오른다

―최규승, 「하여가」 전문

(최규승, 『처럼처럼』, 문학과지성사, 2012)


#서해 #해지는풍경 #박혜정 #희생 #기억 #하여가


https://youtu.be/XoVHO63NX2w?si=4ePvBdj2s3YVK-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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