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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Jul 06. 2021

누구든 다 알고만, 있지

음악×문예 05 _레너드 코헨, 「Everybody Knows」

음악×문예 05

레너드 코헨, 「Everybody Knows」



오래전 영화, 폴 버호벤의 <토탈 리콜>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널드 슈워제네거는 기억을 이식받은 채 지구에서 산다. 그의 아내와 친지, 이웃들조차 기억을 이식받고 그와 함께 살아가면서 그를 감시한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정의는 승리(?)하고 그는 기억을 되찾는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를 때쯤 이 근육질 아저씨의 고뇌와 이후의 삶을 곱씹어보게 된다. 기억을 되찾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그는 정말 자신을 되찾은 것일까?


어떤 계기로 자의든 타의든, 알든 모르든 기억을 이식받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예전의 기억을 회복한다면 이식된 기억으로 살아온 시간은, 그 기억은 자신의 것일까,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의 미로는 정말 복잡하고 입체적이어서 심해에 닿을 만큼 긴 실로도 해결할 수 없을 듯하다.


<토탈 리콜>의 주인공이 자신도 모르게 타의에 의해 기억이 이식되었다면 윤대녕의 소설, 『사슴벌레 여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어쩔 수 없는 상황(해리성 기억상실)이긴 하지만 자의로 기억을 이식받는다. 그 기억은 우연히 자신과 연결된 것이어서 이를 계기로 그는 상실된 자신을 더듬어 찾아가게 된다. 마침내 옛집을 찾아가나 이미 자신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므로 결국 거기서 살지 못하고 자신의 집(이었던 곳)을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



이식된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이르면 정체성이라는 진지하고 우아한(?) 개념도 삶 앞에서는, 몸 앞에서는 귀찮아진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기억으로 쌓아 올린 정체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로운 기억은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하는 따위들.


기억 이식은 먼 미래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영역을 넘어 그 아이디어의 폭을 조금만 더 넓혀보면 그에 버금가는 사건이 많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 수사 기관에서 행해졌던 간첩 조작 사건이다. 여기에는 대부분 심리적ㆍ육체적 고문을 동반하는 기억 이식 방법이 쓰이는데, 비유하자면 외과적 뇌수술을 마취 없이 진행하는 정도의 고통이 수반된다. 이때 이식은 시간의 문제이지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조작된 간첩 사건을 밝히기 위해 여러 사람이 용기와 끈기로 지난날의 상처를 스스로 들춰냈고 그 고통을 다시 감내해왔다. 조작이 밝혀진다 해도 사건의 피해자들의 고통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통의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진 것이지 싶다. 그런데 정말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추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는 그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을 회피하거나 지워 없던 일로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 이식된 기억을 아직도 자신의 경험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기억을 여전히 사실로 믿으며 ‘그때가 좋았지’ 하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추억한다.


이성복은 「그날」이란 시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역설로 닫힌 사회의 기억 이식이 ‘말 못 함’, ‘외면’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말을 잃어버린 시대를 지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해서 역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외면은 체념으로 바뀌고 반어의 자리에는 냉소가 자리 잡는다.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에는 차라리 눈 감지 못하는, 냉소적 역설로 가득한 시선이 있다. 그는 아주 낮은, 그러나 마음의 바닥을 뒤흔드는 목소리로 묻는다. ‘당신이, 그리고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인가?’라고.



누구든 다 알지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것을. 누구든 다 구르지 대박을 꿈꾸며 그 주사위처럼. 누구든 다 알지 전쟁은 끝났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멋진 젊은이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승부는 이미 결정 났다는 것을.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은 그냥 그 자리, 부자는 더욱더 가진다는 것을. 당연해, 모두들 다 그렇게 알고는 있지.


누구든 다 알지 배에 구멍이 났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선장이 거짓말했다는 것을. 누구든 다 마음의 상처를 안지 아버지나 개의 죽음을 맞았을 때처럼. 누구든 다 말하지 자신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누구든 다 바라지 초콜릿 한 상자와 기다란 줄기 끝에 달린 장미를. 모두들 다 그렇게 알고는 있지.


누구든 다 알지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정말 그렇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당신은 지금껏 진실하므로 하루 이틀 밤을 주거나 받거나 하시길. 누구든 다 알지 당신은 지금껏 신중했지만 껍데기를 벗고 만난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모두들 다 그렇게 알고만 있지.


누구든 다 알지 그것은 다시없는 기회란 것을. 누구든 다 알지 그것은 나 아니면 당신이란 것을. 누구든 다 알지 당신은 영원하리라는 것을. 한두 줄의 글을 썼을 때 이미 그렇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그 거래는 이미 썩어버렸다는 것을. 올드 블랙 조는 여전히 목화를 따지, 당신들의 리본과 나비넥타이를 위해. 모두들 다 그렇게 알고만 있지.


누구든 다 알지 페스트가 번져온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너무나 빠르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는 단지 지난날의 번쩍이는 가공품이란 것을. 누구든 다 알지 풍경은 이미 죽었으나 당신의 침대 위에서 자그마하게 존재하리란 것을, 곧 나타날 거란 것도. 모두들 다 그렇게 알고만 있지.


누구든 다 알지 당신이 곤경에 빠졌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당신이 통과해온 것은 갈보리 언덕의 핏빛 십자가에서 말리부 해변에 이른다는 것을. 누구든 다 알지 곧 그것은 나눠질 것이란 것을, 예수의 마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하나가 된다는 것을, 그것이 날려가기 전에. 모두들 다 그렇게 알고만 있지.

―레너드 코헨, 「Everybody Knows」 전문

Leonard Cohen, 『Stranger Music』, Vintage Books, 1993.




이식된 죄의식, 이식된 욕망


문학작품 속의 많은 주인공은 자신의 원 체험을 ‘세계의 빈곤함’과 ‘사람됨의 피곤함’으로 드러낸다. 현실도 마찬가지. 행복하게 살던 사람도 심연으로부터 솟아 오른, 잊고 살던 과거의 상처로 한순간 불행해질 수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 역시 이식될 수 있는 것이므로 조작된 사건의 범법자가 다행히 자신의 결백함을 기억하고 있다 해도 사회는 조작 그 자체를 정신적 외상으로 드러낸다. 그러므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신의 죄로 기억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상처를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하고 살아가는 셈이다. 결국 그 상처를 치유한답시고 덤비는 ‘선무당들’이 많은 이즈음, 그들은 이식된 죄의식에 더해 사회로부터 도려내어질 두려움으로 또 불안해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도덕적이든, 의학적이든 기억 이식에 대해 비판적인 듯하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단호히 거부할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특히 한국의 수험생들은 너나없이 그 대열에 줄 서기를 할 것이다. 그 줄 서기나 시험 성적이나 마찬가지인 줄도 모르면서. 피카소의 기억을 이식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피카소가 될 수 있을까? 예술은 머리가 아닌 손으로, 몸으로 하는 것이므로 아는 것과 그리는 것은 일치하기가 어렵다. 설사 일치한다고 해도 그가 그린 그림은 겨우 피카소의 ‘짝퉁’일 테니.


‘토탈 리콜’의 세상, 사람들은 ‘기억 이식’으로 현실의 결핍을 채우고자 한다. 그러나 그로써 어느 정도 욕망은 충족될지는 몰라도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아니 어쩌면 한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기억 이식인’―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기억을 이식받은 사람과 이식받지 못한 사람. 이분된 세계가 어떠하리란 것은 누구든 다 안다, 정말? 누구든 다 그렇게 알고만, 있다.


#토탈리콜 #사슴벌레_여자 #그날 #기억이식 #반어 #역설 #외면 #냉소


https://youtu.be/T4rf7bAAp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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