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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Jun 16. 2021

예가체프

커피×사람 04 _이 편지는 ‘픽션’입니다

커피×사람 04



1


편지의 처음을 어떻게 시작할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웠던, 그래서 언제부턴가 습관적이기까지 했던 당신의 이름이 오늘은 너무 생소해서 편지지를 여러 장 구겨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이란 말도 생경합니다. 그대라 하려 해도 내 목소리는 자꾸 안으로만 달아납니다. 지금, 편지지에 닿은 펜이 입속의 그 말을 끄집어내기에는 무기력해 보입니다. 그, 대… 마치 늦가을 제비집처럼 휑뎅그렁해서 다른 글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 그 말을 작은 소리로 자꾸 반복해봅니다. 이태 동안 쓰지 않은 말이지만 입속의 생채기처럼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 혀끝에 닿습니다. 그럴 때면 당신의 얼굴은 선명해지고 그 얼굴에 합당한, 아니 적당한 단어를 떠올리기 위해 몸속의 단어들을 끄집어내 조합을 해보지만… 없습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어색해도 그냥 적당히 웃고 넘어가시길….


오늘 당신을 그곳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라도… 꿈? 꿈에서는 가끔 당신을 만나기도 했는데…, 아무튼 그러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얼핏,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당신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신과 나의 행동은 너무나 다른 의미였습니다. 당신의 시선이 화살이라도 되는 듯이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말았지만 당신은 내게 목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제 만났다 다시 만나는, 지극히 사무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웃음까지 머금은 당신의 모습이 꽤 설면했습니다. 하지만 지극히 당신다운 모습이었지요.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낯선 정도가 아니라 아마 딴 사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당신의 곁에는 3년 전, 그때처럼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의 남자들처럼 당신을 대하지는 않더군요. 지극히 정중하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그들은, 그러나 완벽히 무감각해서 사람이라기보다는 당신의 몸을 실루엣으로 비추는 반투명의 견고한 막 같았습니다. 열릴 것 같지 않던 그 막을 제치고 당신은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순간, 많은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고 나는 그 시선의 무게에 눌려 한껏 마음을 구겼습니다. 그 극장 앞 빈터의 목련이 환한 시선으로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나는 동행했던 친구들을 잠깐 바라보았을 뿐 당신의 접근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내 시선을 먼저 가라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짧게 웃어 보이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친구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회사 동료인 그들과 나는 또 다른 동료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한껏 행복한 웃음을 담은 신랑과 신부의 얼굴은, 그러나 내 눈에 와 부딪히면서 미라의 미소처럼 변주되었습니다. 미라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웃음이 그렇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는 것입니다. 오랜 어둠을 견디고 마침내 발견된 미라. 하지만 그 어둠을 걷어냈던 빛이 도리어 그를 굳어버리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이집트의 미라 사진을 보며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미라들의 결혼을 축하하며 이집트 미라를 닮은 고졸한 미소로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미라 한 쌍을 꿈꾼 적이 있었지요. 당신은 이제 우리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당신과 나는 함께 그 꿈을 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건, 어쩜, 꿈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꿈이 깨어지던, 그 계절은 왜 하필 겨울이었는지…. 그렇다고 봄이거나 가을이었어도 따뜻하거나 화사하지 않았겠지만,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었죠.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얼음 칼에 베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위는 날카롭게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그 겨울 동안 나는 아홉 상자의 귤을 먹어 치웠습니다. 아니 엄밀히 얘기하자면 모두 먹은 것은 아닙니다. 다량의 귤이 상자에서 아무런 완충장치도 없이 뒤섞여 있다 보니 때론 짓무른 것도 있었으니까요. 그런 것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처넣었습니다. 그리고 손가락과 옷자락, 심지어는 이불깃과 방바닥에 스며든 황색의 귤 입자들은 내 속에 들어오지 못한, 음식으로서의 제 본분을 다하지 못한 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마 음식보다는 천연물감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요? 그 흔적은 두 해가 지난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그 겨울 동안 나는 귤을 까면서 당신이 떠난 그 추운 방의 방바닥에 엎드리거나 누워서, 그 겨울보다 더 추운 당신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습니다. 컴퓨터에서 백업 파일까지 속속들이 찾아내어 지우듯이 말이죠. 그렇지만 때론 ‘지우겠습니까’란 물음에 선뜻 ‘예’를 클릭할 수 없는 흔적 앞에선 ‘아니오’를 누르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귤 까는 버릇은 나와는 달랐죠. 나는 꼭지 반대편의 움푹 들어간 곳에 엄지손가락을 눌러 넣어 까는데, 당신은 귤을 양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자근자근 주무른 다음 뚜껑을 열듯이 꼭지를 살짝, 손톱 끝으로 들어냈습니다. 지금도 그 버릇은 여전하겠죠. 나는 당신의 그 버릇이 너무 멋있어 보여 내 손에도 익혔었죠. 그렇게 익은 손버릇은 아홉 상자의 귤이 없어진 다음에야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그 버릇은 의식의 뒤편에서 성큼 손끝으로 달려 나옵니다. 그러면 갑자기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맙니다. 그러곤 얼른, 귤을 뒤집어 꼭지 반대편에 엄지손가락을 푹, 찔러 넣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확신에 차 있었는데 지금 그 ‘확신’은 ‘어쩜 그랬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지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지난 일… 뒤돌아서 손을 뻗으면 손안에 출렁이며 담길 것 같은 당신과 나의 일이 조금씩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 그림들 끝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그림의 공간으로 슬몃, 들어오는 당신이… 나는 지금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2 


“거기 찾아가려면 어떡해야 하죠?”

   

당신은 내게 목소리부터 보내왔습니다. 수화기에서 울려나오는 당신의 목소리는 노곤한 점심 직후의 근무 시간을 흔들어놓았습니다. 거기, 하고 끊지 않고 단숨에 한 문장을 뱉어버린 그 말, 자신이 누군지, 왜 가려는지 설명도 잘라버린 그 말에 나는 당황했습니다. 잠시 뒤에, 당혹감은 가벼운 불쾌감으로 변했고, 그런 감정 속으로 궁금증이 끼어들었습니다. 나는 회사의 위치를 자세히, 그러나 건조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당신은 설명을 듣자마자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습니다. 나는 잠시 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전화기를 큰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습니다. 사무실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바위 밑에 송사리 모이듯이 내게 던져졌습니다. 나는 짐짓, 굉장히 언짢은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들의 시선을 찡그린 인상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상 밑의 진짜 내 얼굴은 당신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주 날카로운 눈매, 턱이 살짝 올라간…. 뭐 그런, 당돌한 목소리에 어울림직한, 지극히 상투적인 상상으로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손은 연필을 쥐고 스케치 노트에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었죠. 그날 퇴근 시간 전에 꼭 끝내야 하는 어떤 사람의 자서전 표지 디자인 스케치 위에 말입니다. 내 손이 저지른 행위를 내려다보고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옆자리의 동료가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떤 가면도 쓰지 않고 웃는 얼굴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얼굴과 그림을 번갈아 보다가 봄이군, 했습니다. 그래요. 아마 봄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사무실 안은 아직 히터의 힘을 빌려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창밖은 목련의 우윳빛 몽우리가 촛대처럼 맺혀 있었습니다. 바람은 사늘했지만 바람 끝의 목련은 다가온 봄에게 보얗게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내게 삼월의 봄바람 같았습니다. 열린 창문으로 몰래 들어와서 나를 툭, 건드렸습니다.

   

창(窓), 하면 입안에 맴도는 반짝이는 공기. 그즈음 나는 창을 통해 거리를, 하늘을,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고 탐색하는 데 지쳐 있었으니까요. 영화 스크린 같은 창을 통해 움직이는 사물을 그저 바라보는 것, 그것은 마음을 통과하며 내리는 비를 느낀 것만큼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은 그즈음의 내게 안쪽에 안주하게 해주는, 그래서, 너는 안쪽에 있어, 상관없지 뭐, 하고 말해주는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하늘도 창을 통해 보면 얼마나 새로운가요. 갑자기 공간을 접어버리고 그곳에 도착한 어떤 깨달음 같은, 낙엽 활엽수의 푸른 나뭇잎이 무한히 확대된 것 같은 넓고 싱싱한 하늘. 그런 세계를 창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러나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줄곧 기다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서전 표지 디자인에 골머리를 썩이며 일을 맡긴 출판사의 독촉 전화를 받느라 그날 오후를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게 흘려버렸습니다. 그럭저럭 그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 시간이 되어 책상을 정리하다가 당신을 상상한 우스꽝스런 그림을 발견했습니다. 그때서야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평소에도 회사의 위치만 물어보고 정작 일을 맡기러 오지 않는 사람이 더러 있었으므로 당신에 대한 궁금증은 책표지 초안과 함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창틀에는 길어진 낮의 꼬리가 거무스름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당신은 목소리보다 3일 늦게 도착했습니다. 마치 지구의 반대편, 남미나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방금 서울에 도착한 사람처럼, 전화할 때와 도착의 간극이 당연하다는 듯이 굴었습니다. 선배이기도 한 그 회사의 실장 앞에서 당신은 늦게 온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이 밝은 표정으로, 그러나 의뢰인의 권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일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을 나는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관찰, 그래요. 나는 당신을 그저 쳐다본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조립해서 마음의 스케치북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하고는 생뚱하게 달랐습니다. 키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눈은 활짝 핀 소국(小菊) 같았습니다. 거기에다 어깨 끈 달린 바지를 입은 모습은 전화선을 타고 오던 당돌한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간혹, 당신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실장의 얘기를 들을 때, 윗니로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면서, 미간을 주름지게 하는 모습이 전화 속의 당신을 잠깐 드러나게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나이테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책상 너머에서 당신을 주시하고 있는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실장을 바라보던 밝은 표정을 지우고 얼굴을 돌려버렸습니다.

   

잠시 후, 실장이 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맡겼죠. 그 일은 시일이 촉박했습니다. 이틀을 연달아 밤을 새지 않으면 소위,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얼굴을 한번 쓱, 쳐다보고, 당신이 정리해온 원고 뭉치를 실장의 책상 위에 놓아버렸습니다. 내심으론 당신이 내게도 밝은 표정을 보내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내게 부탁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실장을 채근했습니다. 실장은 중간에서 곤란한 처지가 되어, ‘허, 이것 참’을 연발했습니다. 사무실 안의 모든 시선이, 처음 당신이 전화했을 때처럼 내게로 향했습니다. 당신은 나중에 그런 내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고 했습니다. 어항 속의 물오리 같았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죠. 그래서 더욱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고 했었던가요? 아무튼 그때 내 모습이 당신에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옵니다.

   

결국, 당신의 일은 내가 맡게 되었습니다. 원고를 안고 자리로 돌아오자 옆자리의 동료는 빙긋, 웃으며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 바람에 나는 원고 뭉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때서야 당신은 내게 눈길을 주었습니다. 나는 원고를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그때 당신은 성큼, 내게 다가와서 원고를 주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당신의 일은 연극 팸플릿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나는 그 기사를 신문의 문화면에서 읽은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연출하고 주연으로 나오는 그 연극은, 무대를 서울 도심의 어두운 건물 뒤쪽으로 설정한 현대적이고 한국적인 시도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내게 디자인의 콘셉트며, 흐린 원고의 내용까지 세세하게 설명해준 당신은 그 일을 많이 해본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당신이 내게 어떤 신뢰를 주었습니다. 비록 의뢰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으로 서로 처지는 달랐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신뢰 같은 것, 그런 믿음이 내게 전해져 왔습니다.

   

이런, 만년필의 잉크가 다되었네요. 그래요, 당신이 사준 그 만년필입니다. 그런데, 잉크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만년필과 함께 서랍 속에 넣어두었는데…. 할 수 없군요. 그럼, 펜을 바꾸겠습니다. 필체가 약간 달라지더라도 이해해주시기를…. 왜 하필 지금 잉크가 떨어지는지….


3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당신을 처음 만난 얘기를 하고 있었군요.


당신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 아버지의 일을 하면서 나는 이틀 동안 꼬박 밤을 새워야 했습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리지만 당신과 함께 지낸 그 밤을 생각하면 아릿한 기억은 추억으로 자리를 바꿔 앉습니다.

   

둘째 날 저녁에 당신은 교정을 보러 왔습니다. 당신은 그 밤 동안 당신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밝고 당당함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을 당신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감춰진 또 다른 당신을 그날 밤 나는 발견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보여주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 내 옆에서 당신은 프린트된 교정지에 빨간 펜을 익숙하게 그어대면서, 교정된 글씨를 읽어주듯이, 얘기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 얘기할 때는, 손을 잠깐 멈추고, 멍하니 어두워진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겨울의 부스러기가 섞여 있는 그 삼월의 창밖 말입니다.

   

그때 나도 오른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의 움직임을 멈추고 당신의 눈길을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내 시선은 창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유리창에 걸렸습니다. 거기, 당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고 언뜻, 당신의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본 듯 했습니다.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 이었습니다. 연극에 빠진 아버지와 어려운 생계, 그리고 떠난 어머니에 대해…. 담담하게 이어지는 당신의 얘기 속에 묻어 나오는 아버지와 어머니란 말 다음에는 쉼표가 자리 잡았고 잠시 동안 말의 빈터가 생겼습니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당신은 펜을 서너 바퀴 돌려가며 교정지를 훑어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대에 서고 싶다는 당신의 마음을 쏟아놓을 때 말의 빈터는 더욱 늘어갔고 난 당신의 뚜렷한 옆얼굴에서 문득, 당신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당신 어머니의 얼굴이 왜 겹쳐졌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막연히 당신 어머니 역시 배우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랬습니다. 나중에 당신이 보여준 사진 속의 어머니는 바로 당신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당신은 기억의 아득한 끝에 무대가 있다고 했습니다. 다섯 살의 어린 당신이 아버지와 함께 출연했던, 아늑한 무대를 떠올릴 때 내 앞의 컴퓨터는 화면보호기를 드러낸 지 오래였고 당신 역시 쥐고 있던 펜을 놓아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 뒤 당신이 어떤 얘기를 더 했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순간 당신의 입속으로 커피처럼 스며들었던 것밖에는…. 나는 어떻게 작업을 마쳤는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컴퓨터의 화면에서 빠르게 당신이 교정본 붉은 글씨들이 자리 잡았다는 것과 당신 아버지의 사진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는 것만이 떠오릅니다.


4


“예가체프 향이 나요.”

   

그다음 날 아침, 당신을 바라봤을 때 내게 한 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예가체프를 즐겨 마셨습니다. 그 커피를 마시면 당신과 함께 지샌 그 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 당신도 나와 같은 커피를 마시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이 몸속으로 흘러드는 온기와 함께 펼쳐졌습니다.

   

팸플릿은 공연 시간 바로 전에, ‘극적’으로 완성되어 나왔습니다. 그것을 싣고 나는 대학로의 그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극장 앞에서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가져간 팸플릿을 구석에 부려놓고 당신을 찾았습니다. 당신이 그 밤, 내게 일러준 당신의 이름은 그러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대고 그의 딸이라고 했을 때, 그중 한 사람이 씩 웃으며, 예명을 또 바꾸셨나, 했습니다. 비웃음이 묻어나는 그의 손가락 끝을 따라 무대 뒤의 분장실로 들어갔습니다. 당신은 아버지의 의상을 챙기다가 나를 발견하고 소국 같은 둥근 눈을 깜박, 했습니다. 그 잠깐의 시간이 꽃망울이 피어나는 시간만큼 아늑하게 길었습니다. 당신은 나를 당신 아버지께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당신 아버지는 짧게, 수고했네, 했을 뿐 더 이상의 눈길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공연이 끝난 뒤 알 수 있었습니다.

   

연극을 보는 내내 잠의 더께를 걷어내느라 고생해야 했습니다. 잦은 밤샘 작업의 피로를 이길 만큼 그 공연은 내 신경을 자극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옆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연신 고개방아를 찧었거나 나와 버렸을 것입니다. 다만 재개발지역 가로등 아래에서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당신 아버지를 보면서 문득, 내 고도는 당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당신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으나 감각할 수 없는 내 마음의 고도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접으면 당신은 분명히 내 옆에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당신의 눈을 봤습니다. 소국을 닮은 당신의 눈 속에는 무대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 눈은 지난 밤 내 옆자리에서 창밖을 응시하던 눈망울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눈망울의 이미지는 내게 남아 있습니다. 잠시 후, 당신의 주위로 여러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당신과 오랜 교감을 나눈 듯한 그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나는 주눅이 들었습니다. 무대를 바라보던 당신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살짝 애교를 띤 밝은 당신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때 무대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당신 아버지가 내 눈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 상황이 너무 어색해 그 남자들 틈에서 슬그머니 빠져 나왔습니다. 집으로 오는 동안 당신과 그들의 모습이 연거푸 겹쳐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포장마차의 불빛이 보였고, 곧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날 내내 나는 이불을 고치처럼 말고 지내야 했습니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섞였던 동네 아이들의 소리가 커졌다 잦아들었다 하는 사이 소국을 닮은 당신의 눈망울이 내 마음속에서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꽃은 떨어지고 시든 줄기만이 초라하게 남았습니다. 그때, 우리의 인연이 끝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당신도 해본 적이 있는지요? 마음속의 소국, 당신은 그 꽃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모를 것입니다. 잠시의 해프닝 같은 당신과의 만남을 그 한낮 동안 정리하고 나는 창밖으로 내밀었던 몸을 다시 안쪽으로 집어넣었습니다.


5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가방이나 받아주지 않고선….”


창밖에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당신은 여행용 가방을 디밀면서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몇 개월 사이 당신은 수국(水菊)이 되어 있었습니다. 비에 젖어 물기 머금은 당신의 몸에서는 안개가 피어올랐고 아침나절의 수국처럼 당신은 향기와 함께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당신은 내게 예가체프 향이 난다고 했는데, 그날 밤, 내 몸에 배어든 당신의 향기는 무엇이라 해야 할지…. 수국 향? 그래요. 당신은 물 내음에 잠긴 새벽 강가의 수국입니다.


당신이 머문 동안 내 방은 그 향기로 가득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왜 집을 나왔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나도 굳이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처음 며칠 동안은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산책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내 물음에 앞서 하루 동안 있었던 당신의 외출에 대해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혼자 집에 있는 낮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질 때나 확인해야 할 것, 가령 두고 온 수첩에 적혀 있는 비밀번호 같은 것이 있어서 전화를 하면 통화 중일 때가 많았습니다.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통화는 당신과 함께하는 식사처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쩜, 그런 생각이 당신과 맺은 인연을 흐리게 하고 결국 우연한 만남이 아니면 서로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이즈음 생각해봅니다. 당신도 그렇게 무른 내 성격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당신의 전화를 나는, 예전부터 알아오던 그 남자들과의 통화라고 짐작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주위에 그림자처럼 있던 그 남자들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질투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과 함께 지낸다는 사실에 자신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많은 조명 아래에서 당신의 몸이 만들어놓은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어지럽기는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선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화는 처음부터 그 남자들 중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나의 옹졸함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향기가  방을 채운   달여가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가을이 곳곳에서 나뭇잎 타는 냄새로 짙어지던 시월 끝자락의 어느 , 인쇄소에서 감리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책상  메모지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름은 당신과 만나게 해준 <고도를 기다리며>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오롯이 당신의 아버지로서  앞에 새겨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가까운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선뜻 가지 못하고 조금 망설였습니다. 당신이  방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당신 아버지에게 어떤 변명의 말을 마련해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 말고는 그에게 어떠한 말도 확인해주기 싫었고, 또 얘기할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당신 아버지의 말에 눈 녹듯이 녹아 내렸습니다. 그랬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말은 여름 햇볕처럼 따갑고 직설적이었습니다. 아무런 앞선 말도 없이, 가령, ‘어서 오게나’라든가, 아니면, ‘앉게’라든가 하는 말은 생략한 채 자리에도 않기 전에 뭉툭, 용건을 쏟아놓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얘기는 사무실에서 카페까지 가는 동안 발걸음을 늦춰가면서 생각해둔 예상 질문을 산산이 부수면서 내게 던져졌습니다. 물론 당신에 대한 얘기였죠. 하지만 그건 가출한 딸에게 갖는 격양된 ‘애정’이 아니었습니다. 지극히 냉정하게 당신의 행위를 질타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나를 향한 것도 일부 있었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의 그 행위를 부추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당신의 행위, 그러니까 전화 통화를 나무라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 방에서, 낮 시간 동안 여러 극단의 단장들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당신의 아버지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연극의 캐스팅을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내게 그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때론 정중한 것도 소름 돋도록 무서울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전화 통화를 중지시켜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나는 한동안 그에 대한 대답은 물론 고갯짓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 아버지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전화위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당신의 아버지가 ‘아버님’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보기도 했으니까요. 당신 아버지는 연극 속의 한 인물처럼 냉정하게 나를 대했습니다. 나 역시 그의 상대역인, 얼어붙은 한 인물을 연기하고 있었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그러고선 내 대답이 중요치 않다는 듯이, 그렇게 알고 가겠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뒤따라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사막을 걸어가는 한 마리 낙타를 본 듯도 했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사막의 모래언덕을 넘어가고 한참을 지난 다음에야 나는 그곳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자리를 나오면서 당신보다 나 자신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 그래요. ‘자존심’이라고 하면 될까요? 상투적인가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것과 비슷한 거였습니다.

   

그날 나는 당신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당신이 내게 당신의 전화 통화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듯이…. 그러나 그날부터 나는 당신의 통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메모해둔 전화번호라든가 툭툭 분질러 써놓은 전화 내용을 이리저리 맞춰보면서 당신이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당신은, 연극은 물론 영화 쪽으로도 관심을 펼쳐나갔습니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당신 아버지와는 다른 의미에서 당신의 전화 통화가 멈춰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너무 측은해 보였습니다. 푸른 하늘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날아오르지 못하는 새장 속의 새처럼 당신의 아버지라는 창살에 막혀 있는 당신, 아, 상투의 연속이군요. 그럼에도 나는 내심 당신이 비행을 포기하고 그 새장 속에 안주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창살 속으로 나는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는 그곳은 내게는 어떤 공간보다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창살 속의 자유. 당신도 얘기했다시피 그것은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창살을 애써 외면하고 작은 공간에 안주해 살아가는 날개 잃은 새. 하지만 나는 그 공간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애써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공간에서조차 날갯짓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창살에 부딪칠 때마다 점점 날개가 강해졌습니다. 단단한 창살의 속성이 당신 날개에 전이되었다고나 할까요. 처음의 그것은 너무 부드러워 내 마음에 가벼운 바람을 일으킬 뿐이었는데….


6


“당신이 뭔데! 간섭 말고, 옷이나 좀 어떻게 해봐요!”

   

그해 겨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날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처음 당신이 외박을 한 날 말입니다. 당신은 이 대목을 읽고 빙긋, 웃을지도 모릅니다. 하기야 그걸 외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정확히 따진다면 당신은 그날 처음 외박을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내 방에서 외박 중이었으니까요. 아무튼 당신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옷을 벗지도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습니다. 당신 팔과 엉켜 있는 외투를 벗겨주자 당신은 곧바로 침대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마치 엉킨 실타래 같았습니다. 갑갑한지 블라우스의 앞섶을 잡아당겼습니다. 그 힘에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와 방바닥을 헤맸습니다. 그 밤 내내 나는 향기를 잃어가는 수국을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출근할 때까지 당신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식어버린 콩나물국을 냄비 속에 부어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성큼, 겨울로 들어선 아침 바람이 자꾸 나를 건드렸습니다. 전철역까지 마을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 길에는 낯선 것투성이였습니다. 처음 보는 듯한 길가의 간판들. 당신이 드나들었음직한 동네 슈퍼마켓, 세탁소 들이 모두 어젯밤에 신장개업한 듯이 내 옆을 비껴나고 있었습니다. 문득, 인기척을 느꼈고, 바로 당신이 아직도 잠자고 있을 집 쪽을 돌아봤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그 집은 소실점이 되어 길 양쪽의 가게들을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자꾸 뒤로 끌리는 듯했습니다. 마침 그때 마을버스가 그 소실점에서 빠져나와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손을 크게 흔들어 차를 세웠습니다. 나의 과도한 손짓이 이상했던지 버스카드를 꺼내는 나를 버스 기사는 유심히 건너다봤습니다.

   

그날은 온종일 모든 것이 낯설어 보였습니다. 거의 매일, 교정지나 출력물을 들고 다니던 골목길이 마치 꿈길처럼 아득했습니다. 인쇄소를 찾아가야 하는 발걸음이 어느새 제본소가 있는 지하 계단을 밟고 있었습니다. 다시 계단을 올라와 인쇄소로 방향을 잡고 심호흡을 크게 했습니다. 그때, 불현듯, 낯설게 느껴지던 골목길이 선명해졌습니다. 오래전 내 모습이 빛바랜 사진처럼 거기 아득하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추억의 자리로 밀어 넣으려 해도 자꾸 빠져나와 바늘처럼 나를 찌르는 기억들. 나는 급히 사무실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시간을 다투는 색 샘플과 교정지를 인쇄소에 전달하지도 못한 채…. 옆자리의 동료가 그걸 빼앗다시피 들고 사무실을 나설 때에도 나는 멍청히 창밖만 바라봤습니다. 무대 소품 같은 목련의 앙상한 가지들이 창백한 하늘을 나누어놓았습니다. 간혹, 바람이 그 가지에 앉았다 날아갈 때, 가지들은 힘겹게 흔들렸습니다. 그런 풍경을 퇴근 시간까지 바라봤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방안의 모습은 아침 출근 때 그대로였습니다. 당신의 부재만 빼고는.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당신은 내게 메모를 남겨놓았습니다. 그 메모는 아침에 당신 몫으로 차려놓은 밥상의 빈 국그릇 밑에 놓여 있었습니다. “넥타이 너무 길게 매지 말아요. 벨트 아래로 내려가지 않게요. 양복과 어울릴 만한 넥타이는 양복 안주머니에 하나씩 넣어놨어요. 그리고 양복 주머니 덮개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신경 좀 쓰세요.” 그게 다였습니다. 그날 밤부터 마침, 추운 겨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두 번의 겨울이 지나고 당신을 다시 만났습니다. 목련이 다시 피어 당신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것은 3년 전, 당신과 함께 왔던 그 목련은 아니었습니다. 그 극장 맞은편 카페에서, 당신은 나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사이 당신을 알아보는 어린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건너다보면서 당신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이제 당신 아버지는 더 이상 당신에게 창살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인하는 손길이 아름다운 날갯짓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당신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자꾸 비어져 나오는 지난날의 내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바늘처럼 나를 찌르는 않았습니다. 그 기억들이 당신과 함께했던 시간과 어우러져 향기를 내는 듯했습니다.

   

예가체프 향은 당신이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향기는 당신의 향기였습니다. 자신의 향기는 스스로 맡지 못하므로 누군가를 통해 맡게 되는 거니까요.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 향기를 심어준다면 당신은 지금보다 더욱 높이 날지도 모릅니다. “예가체프 향 같은 배우” 신문에서, 조만간 이렇게 쓰인 기사를 보게 되기를.


이만 줄이겠습니다. 예가체프 같은 그대, 부디 건강하시길….


#예가체프 #소국 #수국 #향기 #기억 #바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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