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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May 11. 2021

쓸쓸한 날에는 벌판 넘어

음악×문예 04 _허영자, 「어떤 날」

음악×문예 04 

허영자, 「어떤 날」



5월이다. 5월은 실내와 실외의 온도가 역전되는 계절이다. 아직 약간은 서늘한 실내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눈이 감긴다. 실눈 속으로 파고드는 풍경은 이즈음에는 어디나 한결같다. 햇살이 아름다운 시간. 피사체보다는 그것을 드러내주는 햇살만이 진정한 풍경인 계절. 5월의 햇살은 비 오는 날도, 흐린 날도 빛난다. 그 햇살에는 아까시나무 꽃향기가 섞여 있어 더욱 눈부시다.


눈의 조리개를 온전히 창밖에 맞춘 채 조금 시간을 흘려보내면 몸을 담은 실내는 어느새 어둠 속이다. 이때, 실내의 사물들은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몸은 어두워지고 오로지 눈만 밝을 때, 몸은 어김없이 쓸쓸해진다. 외로움이 아닌 쓸쓸함. 고독은 더더욱 아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바깥에서 온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온 정신이 감염되고 또 그 기운을 다시 주위로 퍼뜨리게 된다. 그러나 쓸쓸함은 온전히 몸의 것이다. 밝은 햇살과 맑은 공기, 그리고 특별히 어려움에 처하거나 기분 나쁜 일도 없는데 몸은 쓸쓸하다. 쓸쓸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몸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몸 밖으로 기어 나온다.


햇살 밝은 5월의 실내에서 몸은 쓸쓸함으로 충만하다. 그렇다고 창밖의 풍경이 쓸쓸함과 섞이는 것은 아니다. 풍경은 풍경대로 아름답고 몸은 몸대로 쓸쓸하기만 할 뿐이다. 쓸쓸함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몸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쓸쓸함 속에서 몸은 편안하다. 그 편안한 몸이 가끔 눈 밖으로 쓸쓸함을 밀어낸다. 이때 흘리는, 아니 흐르는 눈물은 흔들리지 않는다. 천천히 눈물길을 따라 내려갈 뿐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가 왜냐고 물으면 아마 가볍게 웃고 말 것이다. 쓸쓸하니까.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벼'


허영자의 시, 「어떤 날」은 이 같은 5월의 어떤 날을 그려낸다. 그녀의 시는 사실 좀 낡았다. 예술이 워낙 그러하겠지만 시는 특히 새로움에 목말라한다. 심할 때는 목을 매기도 한다. 하지만 시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새로움이 불편함이 될 수 있다. 그 길항의 어느 지점에서 예술은, 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허영자의 시는 새로움보다는 낡음으로,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으로 많이 기울어 있는 듯하다. 물론 그의 시가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쓸쓸한 날엔

벌판으로 나가자


아주 매 쓸쓸한 날엔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갈잎은 바람에

쑥대머리 날리고


강물을 거슬러

조그만 물고기 떼

헤엄치고 있을 게다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벼 외로이

모여 있는 곳


아직도 채

눈물 그치지 않거든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허영자, 「어떤 날」 전문

허영자, 『허영자 전 시집』, 마을


쓸쓸한 날, 시의 화자는 벌판으로 나가자 한다. 아주 쓸쓸한 날에는 그 너머 강변까지 가자고 한다. 권유, 또는 청유는 강요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잦다. 하지만 권유적 진술이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은 자연스럽다. 마치 내 마음의 소리가 시를 통해 나오는 것처럼. 어느새 시를 읽는 눈에는 벌판 가득한 햇살 속에서, 그 출렁거림에 몸을 부딪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이윽고 강변에 이르러 강물의 흐름에 따라, 또는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와 잔물결에 부서지는 햇살에 발 담그는 그는, 버려진 아름다움이 되어 또 다른 아름다움과 몸을 ‘부벼’ 5월 한낮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쓸쓸함을 떨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다. “눈물 그치지 않거든 벌판을 넘어서 강변으로 가”자고 하지만 그건 슬픔을 떨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쓸쓸함이 느닷없이 몸속 깊숙이 숨어버리기 전에, 하여 강변에서 버려진 아름다움이 되지 못해 몸 ‘부비’지 못하고 돌아서지 않기 위해, 서둘러 쓸쓸함을 안고 가자는 것일 테다.



몸은 이미 강물처럼 출렁거리니


쓸쓸함이란 극복하거나 넘어설 수 없다. 몸속 깊숙이 있다가 느닷없이, 그러나 부드럽게 드러나는 어떤 욕망이나 무의식이 아닐지… 그 욕망이 5월 햇살 속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 때, 우리에게는 창밖, 벌판과 그 너머 강변이 있다. 아니 있었다. 「어떤 날」이 쓰였을 당시는 상징이면서 사실이었을 ‘벌판’과 ‘강변’은 이제 오롯이 상징으로만 남았다. 창을 열고 내다봐도 눈에는 ‘벌판’과 ‘강변’은 없다. 물론 공원과 둔치는 있지만 거기에서는 더 이상 버려진 아름다움이 몸을 ‘부비’지 않는다. 달리거나 걷는 사람들, 사이클링 중인 사람들이 화살표를 따라가는 옆으로 시멘트 벽으로 유도된 물 흐름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5월의 쓸쓸함을 느끼기 위해 차라리 눈을 감아야만 한다. 쓸쓸함이 몸 밖으로 밀려 나올 때 닫힌 눈 속에 갇히는 것은 아니므로 걱정할 것은 없으리라. 그리고 몸이 기억하는 ‘벌판’과 ‘강변’으로 달려가면 된다. 이때, 그 기억을 도와줄 음악이 필요하다. 조동익 작곡하고 조동진이 노래한 〈어떤 날〉. 그의 목소리는 건조하면서 촉촉하고, 노래의 선율은 밋밋하면서도 출렁거린다. 3분이 갓 넘는 짧은 노래지만 여운은 한없이 길다. 노래는 까마득한 벌판과 그 너머 강변에 이르도록 천천히 걷는 여유로운 발걸음을 닮았다.


식민지 청년, 이상은 벌판에 이르러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더랬다.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권태」) 초록의 권태는 그가 맞닿은 ‘벌판’이다. 벌판 너머 강변으로 가는 길, 권태 너머의 쓸쓸함, 그리고 그 쓸쓸함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외면할 수 없는 햇살의 출렁거림이 창을 두드리는 5월 한낮, 버려진 아름다움이 모여 있는 그곳까지 발걸음을 내딛고 싶다. 아니 이미 감은 눈 속의 나는 몸을 출렁거리며 벌판의 굴곡을 따라 걷다가 길섶의 아까시 향기에 취하기도 한다. 그 너머에 있을, 난반사로 햇살을 잘게 부수고 있을 강물을 찾아가는 길. 하지만 앞으로만 내쳐 걷지 않는다. 강물은 이미 몸속에 들었으니 서두를 이유가 없으니…


#5월 #쓸쓸함 #허영자 #어떤_날 #조동진 #조동익 #이상 #권태 #벌판 #강변 #햇살


https://youtu.be/1l5CUXrB7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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