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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Apr 27. 2021

‘불설탕술’커피

커피×사람 03 _나폴레옹이 사랑한 커피

커피×사람 03


깊은 밤이었다. 우리는, 그렇다 분명 우리였다. 친구의 호출을 받고 그곳으로 숨어든 것은 분명 나를 포함해 갓 스물을 넘긴 새파랗게 젊은 대여섯의 우리였다. 개중에는 주민등록상 아직 성인에 이르지 못한 친구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진눈깨비가 내렸고 바람이 몹시 부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우리는 허름한 4층짜리 건물의 계단을 올라 2층에 이르렀다.


드디어 그가 알려준 가게 문 앞에서 우리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심호흡을 길게 하고 문고리를 당겼다. 누가 문을 먼저 열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우리는 일순 당황한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불투명한 유리문 안은 어두웠고 계단에도 이미 불은 꺼져 있었다.


한 친구가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그었다. 어둠에 싸여 있던 불길한 낯빛 대여섯이 잠깐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우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갔다. 친구 하나가 계단을 헛짚어 앞으로 쓰러졌다. 앞서 내려가던 친구가 그 친구를 잡았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신음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잠시 한숨 소리가 낮게 깔렸다.



심야 호출


우리는 밝은 곳으로 다시 나왔다. 네온사인 불빛이 겨우 스며든 뒷골목이었지만 광명천지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길로 나섰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우리를 초대(?)한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신호는 계속 울렸고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모두 낙담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니,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거리의 불빛을 차지하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반짝이는 장식이 우리의 발걸음을 붙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캐럴도 멈춘 깊은 밤이었지만 아직 크리스마스트리의 깜박이는 불빛은 어두운 가게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웠거나, 며칠 지난 때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연말이었고, 우리는 젊었다. 친구의 호출은 그날 낮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오후 늦은 시간, 그때까지 집에서 빈둥거리다 호출에 응한 친구는 대여섯.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의 주인이 며칠 휴가를 떠난다는 소식에 모두의 마음은 조금 들떴나 보다. 하나같이 티끌만큼의 주저함도 없이 추운 겨울밤을 나섰다.


우리는 어떤 대책도 없이 그 건물 건너편 공중전화 부스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금세 담배 한 갑이 동이 났다. 혓바닥이 까칠해질 정도로 줄담배를 피운 우리는 액체가 필요했다. 알코올이 함유된 액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추위와 건조함과 싸우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을 때, 마침내 그 친구가 나타나고야 말았다. 오랜 기다림의 승리였다. 멀리 얼굴조차 식별되지 않을 거리였지만 우리 중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친구가 틀림없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팔자걸음에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는 구부정한 몸통, 그 실루엣이 지금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불법의 ‘리갈’


가게 안은 온기가 남아 있어 춥지 않았다. 커피 향은 온기보다 더 진하게 남아 실내를 채우고 있었다. 난로를 켰지만 전등은 켜지 않았다. 대신 스탠드의 불빛이 어두운 공간의 한곳을 밝혀주었다. 난로 불빛과 스탠드 불빛은 묘하게 어울려 모두의 이목구비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주었다. 우리는 개중 가장 큰 테이블을 놓고 그 주위로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우리를 기다리게 한 그 친구에게 어느 누구도 불만은커녕 이유도 묻지 않았다. 호출한 이유도 심지어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도. 하지만 뭔가 갈망하는 표정으로 하나가 된 우리는, 주방에서 사부작거리는 그 친구를 바라봤다.


잠시 뒤, 커다란 쟁반에 그 친구가 챙겨 온 것은 술이었다. 흔한 술병이 아니었다. 아, 그 친구를 뺀 모두의 입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탄성이 이어졌다. 부하에게 총 맞아 비명횡사한 대통령이 즐겼다던 바로 그 양주였다. 검붉은 피가 더께로 눌어붙은, 등받이가 있던 방석 앞 탁자에 놓여 있던 바로 그 술. 어린아이의 기억에도 그 이미지는 선명했다. ‘나는 괜찮아’ ‘이 버러지 같은 놈’ 등 상당한 유행어를 탄생케 한 그 술자리. 당시 뉴스에 사망 현장이 공개됐을 때 주위의 남자 어른들은 정작 이 술병을 화제로 삼았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비운이나 슬픔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어떤 어른은 막걸리를 좋아한다더니 속았다며 분개했다. 그리고 ‘채홍사’니 ‘안가’니 하는 은밀한 말이 당시 법으로 금지되었던 외국 양주와 함께 권력의 대명사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양주 이름에 ‘리갈’이 들어 있었다. 물론, 그 리갈(Regal)이, 이 리갈(Legal)이 아니지만… 그런 기억이 오롯이 떠오르는 밤이었고 우리는 술보다는 법을 넘어서는 짜릿함에 가슴 설렜다. 고등학생 때 화장실에서 피던 담배는 이에 견주면 애교에 가까웠다.


병뚜껑은 이미 따져 있었고 술은 반쯤 남아 있었다. 아니, 반이나 남아 있었다. 쟁반을 내려놓자 병 속 술이 가볍게 찰랑댔다. 진한 술 냄새가 병목을 타고 올라 코끝에 전해져 왔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관능적인 향기였다. 우리 앞에 작은 잔이 하나씩 놓였다.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잡아야 할 만큼 앙증맞은 크기였다. 친구는 그 잔에 조심스럽게 술을 따랐다. 금단의 향기는 우리를 하나로 묶었다.


건배! 마치 피아니시모가 표시된 악보를 노래하듯 우리는 건배를 속삭였다. 조심스럽게 내뱉은 소리는 미세한 시차를 두고 겹치며 귓가에서 사각사각 울렸다. 목을 타고 흐르는 강력한 자극은 식도와 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모두 말이 없었다. 감탄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우리 모두는 ‘권력의 자극’에 젖어 있었다. 친구들은 식도의 위치를 잊지 않으려는 듯 연거푸 잔을 채웠다. 하지만 내게는 딱 한잔이었다. 몸속으로 파고드는 알코올의 위력에 내 몸은 이미 무력해졌다. 투박한 손가락으로 잡은 잔을 부딪는 친구들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갔다. 그때까지 그렇게 행복한 붉은색은 보지 못했다. 수평선 하늘을 물들이는 서해의 저녁 해도 그만큼 황홀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불타는 커피


더 이상 술잔을 들지 못하는 나를 위해 그 친구는 커피를 한잔 내려주었다. 친구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안타까움 끝에 묻어난, 그들의 안도하는 표정을 보고야 말았다. 아까운 술이 축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자괴감까지는 아니었지만 살짝 외로웠다. 외로움으로 커피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친구는 나를 위로하듯 커피 잔 위에 고리가 달린 찻숟가락을 얹고 각설탕을 숟가락에 놓았다. 나를 보던 친구들의 시선이 일순 그쪽으로 쏠렸다.


친구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각설탕에 살짝 양주를 따랐다. 흰 각설탕의 모서리가 무뎌지면서 흐린 갈색으로 변해갔다. 달콤하고 짜릿한 향이 코끝에 걸렸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라이터 켜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 냄새가 이 향을 덮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눈을 떴다. 하지만 누구도 담배를 물고 있지 않았다. 대신 각설탕 위에 파리한 불꽃이 피어 있었다. 미세한 날숨에도 흔들릴 만큼 그 불꽃은 파리했다. 불꽃이 조금씩 사그라지면서 각설탕은 점점 각을 잃어갔다. 무뎌진 각은 액체로 변해 커피 잔 안으로 흘러내렸다.


커피 속으로 빠져드는 달콤하고 짜릿한 액체. 이름을 뭐라 붙여야 할지. 불설탕술? 정확한 조어(造語)지만 그 세련된 액체의 이름으로는 적당하지가 않다. 아무튼 그 액체는 검은 커피 속으로 사라졌고 그 향기는 커피 향과 함께 융화됐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커피 향이 달아날까 봐 나는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려 입에 갖다 댔다. 달콤하고 짜릿한, 반짝이는 향이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동경했던 가장 멋진 어른의 향기. 그리고 입안을 감싸고 목으로 넘어가는 ‘불설탕술’커피(으, 무너지는 표현력!). 나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하고 정지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내 손에서 빼앗다시피 가져가 커피 잔을 돌렸다. 모두의 표정 역시 나와 다를 바 없었다. 평소, 술을 예찬하며 커피의 무용성을 설파하던 한 친구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은 양주는 모두 이 커피의 재료로 쓰였다. 우리는 만족한 표정으로 달콤한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남은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으려고 혀를 잔 속으로 밀어 넣었다.


더 나이가 들어서 나폴레옹이 즐겨 마셨다는 이 커피의 이름이 ‘카페로얄’이라는 것을 알았고, 위스키가 아닌 포도로 발효시킨 코냑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 마신 ‘불설탕술’커피만큼 내 몸을 ‘로얄’스럽게 하는 ‘카페로얄’은 여태까지 마셔보지 못했다. 그날 그 낡은 이층 카페의 구석 자리에서 흐릿한 스탠드 불빛 아래 마신 그 ‘불설탕술’커피의 맛은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과 비슷한 이미지로 내 머릿속에 걸작으로 남아 있다. 다만, 그릴 수 없어 이렇게 구구절절 글로 쓸 수밖에.


#시바스리갈 #코냑 #카페로얄 #호출 #추억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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