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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승 Apr 13. 2021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음악×문예 03 _T. S. 엘리엇, 「황무지」

음악×문예 03

T. S. 엘리엇, 「황무지(The Waste Land)」


4월이다. 깊은 봄이다. 지금은 달력에 표시된 날로만 남았지만, 농사가 시작되는, 양력 4월 4, 5일은 24절기의 하나인 청명(淸明)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이때부터 바야흐로 봄이겠지만, 지구온난화와 현대인의 속도감이 더해진 4월은 봄과 여름이 널뛰는 달이다. 낮에 피었던 벚꽃은 밤바람에 목숨처럼 분분히 날린다.


그럼에도 4월의 햇볕은 더없이 따뜻하다. 북향집의 창도 노르스름하게 환하다. 건너편 건물에 반사된 햇빛이 창으로 들어와 방 안은 조명 없이 충분히 밝아진다. 창밖 건물이 바짝 다가와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햇살의 농도와 따뜻함 덕분이 아닐까. 먼 산도 바싹 다가오는 이 계절엔 서먹하던 사람이 일순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차가웠던, 차갑다고 느꼈던 사람이 햇살을 등에 받고 환하게 부서지는 모습에 눈부셔 실눈을 뜨게 된다.



바다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


‘황무지’를 읽는다. 4월의 황무지는 시를 읽는 사람에게나 농사꾼에게나 황폐하다. 따뜻한 햇살은 거친 땅과 대비된다. 그럼에도 읽는다. 아니 읽어야만 한다. 농민의 황무지 읽기는 ‘논밭을 갈다’이거나 ‘경작하다’일 것이다. 봄이 되면 겨우내 준비했던 작은 생명의 씨앗을 황량한 흙속에 정성껏 밀어 넣는다. 서두르지 않고 게으르지도 않게 시간을 호흡하면서 천천히 땅과 하나가 된다.


매년 맞는 봄이라 해서 농사일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농사꾼의 손끝은 익숙하게 땅과 하나가 되지만 마음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순환의 시간은 땅을 예측하게 하고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게 해준다. 농민의 두려움은 오히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 있다. 이때 두려움은 종종 분노로 드러난다. 아스팔트에 심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분노는 좌절의 다른 이름이 된다. 앞으로만 죽죽 뻗은 망망한 아스팔트 길은 언제나 새로움을 요구한다. 거기엔 다시 돌아올 시간이나 계절 따위는 없다. 봄이 와도 그 봄이 아니다.


굴곡 없는 아스팔트를 달리는 사람에게 4월은 더없이 따뜻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지난해와 다르고 다음 해와도 다를, 언제나 새로운 4월. 그럼에도 이 계절이 잔인한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지난 4월들은 돌아온 계절에 겹쳐진다. 동백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 바다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없는 사람들, 땅을 갈아엎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 기억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이 계절은 황무지다. 4월의 햇살이 겨울을 벗어난 사람들의 고통을 찌른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 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 더미뿐

그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엘리엇, 「황무지」 부분

T. S. 엘리엇, 『황무지』, 황동규 옮김, 민음사, 2004



어딘지 모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직선의 시간 위에서 시를 읽는 사람들은 고통스럽다. 그 시간에는 그동안 만끽했던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예찬’ 그리고 ‘생과 자연의 하나 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외면의 편안함’과 ‘응시의 고통’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흘러 돌이킬 수 없으므로. 누구도 예외 없이 어딘지 모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위에 있으므로.


「황무지」의 화자는, 그러므로 고통스럽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제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한 근대의 시간 위에서 ‘4월’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오히려 따뜻”한 겨울에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붙들고 ‘외면의 편안함’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미 깨어 있는 화자는 “잠든 뿌리를 봄비가 깨”울 때조차 고통스러워한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도 그의 눈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순환의 시간으로는 이제 돌아갈 수 없고 직선의 시간은 거부할 수 없다. 직선의 시간 위에서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그래서 더욱 고통스럽다. ‘구원’도 ‘힐링’도 ‘웰빙’도 기억의 고통을 삭일 수 없다. 결국 이런저런 대증적 요법에 마음을 맡긴 채 줄타기를 하며 위안을 바란다. 결국 그 곡예마저 유지할 수 없는 ‘깊은(Deep)’ 계곡에 ‘보라색(Purple)’ 고통의 ‘4월(April)’이 있다.


4월은 잔인한 시간

해가 빛을 내뿜을지라도

세상은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을 응시하네

4월의 비는 여전하고

계곡은 고통으로 가득 찼네

넌 내게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네

나는 잿빛 하늘을 쳐다봐

거기 어딘가에 푸른 하늘이 있어

잿빛 하늘 어딘가에서 너를 찾을 수 있어

왜 그래야만 하냐고 자꾸 물으면

난 통곡하며 말하리라 알 수 없다고


어쩌다가 순식간에 난 잊어버리고 미소 짓겠지

하지만 곧 느끼게 될 거야 끝없는 4월

외톨이 소녀 같은 4월을

내 마음 어두운 곳에서 난 모든 걸 명확히 알 수 있어

태양을 느낄 수 없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이럴 때 봄은 그저 어둠의 계절일 뿐이라는 걸


잿빛 하늘 어딘가에 푸른 하늘이 있어

잿빛 하늘 어딘가에서 너를 찾을 수 있어

왜 그래야만 하냐고 자꾸 물으면

난 통곡하며 말하리라 알 수 없다고

알 수 없다고

―Deep purple, 〈April〉 가사 전문



봄은 그저 어둠의 계절일 뿐


수사적 표현은 다르지만 Deep Purple의 〈April〉은 엘리엇의 「황무지」의 시적 어조와 분위기를 그대로 잇는다. 그 둘 사이의 세상은 끝을 향해 치닫는 광폭한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아우슈비츠’ ‘핵무기’ ‘4・3 제주’ ‘한국전쟁’ ‘중동전쟁’ ‘베트남전쟁’, ‘80년 광주’ 등등 숱한 제노사이드의 정거장을 거쳐왔다. 그 정거장에 ‘2021년 미얀마’가 더해진다. ‘지구 종말 시계’는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눈금을 사람들 눈앞에 디밀고 ‘째깍째깍’ 바늘 소리를 들려주지만 우리에게는 그 시계를 멈출 힘이 없는 듯하다.


“내 마음 어두운 곳에서 난 모든 걸 명확히 알 수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력함. 결국, 세상은 거대한 호스피스 병동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일 뿐이다. ‘지구 종말의 시간에 다다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달 4월을 고통 속에서 되살릴 수 있을까? Chris de Burgh의 〈The Girl with April in Her Eyes〉에 나오는 4월의 눈동자를 지닌 소녀를 문전박대하는 겨울나라의 왕은 우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는 통곡도 없이 조용히 말할 수밖에, “알 수 없다고.”


https://youtu.be/yV8e_RkpiNA


https://youtu.be/FRp_KGtdQp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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