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움 Jul 24. 2019

지도를 그리는 사람 (2)

매직카펫 매거진 1. 여성 사회인 야구선수 이비함님(2)

#지도그리기

#컨트리뷰션contribution

#셀프튠업self tune-up


물론 비함님이 야구만 하는 건 아니다. 어깨 부상으로 야구를 쉬는 동안 스윙 댄스를 시작해서 지금도 하고 있고, 한 달에 한 번씩 글쓰기 모임도 나간다. 좀 더 과거로 올라가 보면 NGO대학원과 경영대학원도 다녔었고 회사에선 노조활동도 했었다.


야구랑 스윙이랑 글쓰기도 계속하시고 책도 많이 읽으시고. 대체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가요?


정해진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느냐. 그런 게 재미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프랭클린 다이어리를 몇 년째 쓰고 있는데 맨날 자기 전에 내일 아침에 눈떠서 밤에 들어올 때까지 할 걸 미리 다 정해놔요. 스케줄이 없다, 이런 거 없어요. 청소할 것도 써놔요. 그러니까 스케줄에 없는 일을 잘 하진 않아요. 예를 들어 번개처럼 '누가 오늘 술 먹으러 올래?’했을 때, 마음이 동하면 가긴 가지만.


일이 너무 재미있었던 시기에 대해 이야기해주신 적이 있었어요.


(그때) 일이 뭔지 확실하게 알았어요. 앞으로 뭘 해도 마케팅으로 밥 굶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했었고. 그땐 취미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노조를 하면서 노조-일-노조-일. (일을) 못하면 안 됐었으니까. 내가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노조원이었고 원년 멤버였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트집 잡히면 우리 노조 깨진다, 왜냐면 스무 명 중에 다 나가고 네 명 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때는 '책잡히면 안 돼, 일을 못하면 안 돼.’


근데 일을 하니까 좀 재밌고 루틴도 생기고 보는 눈도 생기고. 거의 머릿속에 항상 제품 생각밖에 없었고. 아침에 눈떠서 사무실 가서 일하다가 노조회의하고 뭐하고 뭐하다가 집에 와서 저녁밥 먹고서는 이리카페 가서 또 일하고. 허리 뻐근해지면, ‘아, 뿌듯해. 이제 집에 가서 자야지.' 이런 생활.


그때는 회사에서 나오는 모든 문건을 싹 다 읽었어요. 다음날에 가면 오늘은 무슨 메일이 와있을까? 궁금해하면서 가고. 진짜 일이 컨트롤이 되는 때였어요.


뭔가 재미있어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재미를 느껴요? 시작한다고 바로 재미를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바로 느끼진 않죠.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는 거에 되게 집착해요. 열심히 하는 거에 별로 관심 없어요, 사실은. 근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해야지 결과가 나온다는 건 알아요. 그러니까 설렁설렁 대충대충 하면서 잘한다? 그러면 좋겠지만 인생에 있어서 건지는 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해요. 솔직히 될 만한 것만 하긴 하죠.


근데 노조는 진짜 알 수 없었어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이것 때문에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겠다. 이것 때문에 30대가 그냥 끝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 빨리 끝내려고 했던 거 같고. 근데 너무 조급해하지는 않으려고 했죠. 맨날  공문 쓰고, 변호사 만나고, 노무사 만나고. 너무 지겨웠는데 그때 배운 게 엄청 많았어요.


노조활동은 어떻게 하게 시작한 거예요?


한창 쌍용차 노조가 진압될 때였는데, 공장에 헬기로 최루액을 부은 날, 신문에서 본 그 장면이 잊히지 않더라고요. 저기에 한 명이라도 더 가줘야 하는데 나는 회사에 묶여서 못 가고. 배워서 무슨 소용이냐. 그리고 사람들이 이걸 다 알면서 이러고 있겠지?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데?


그러면서 자기가 뿌리 박힌 곳에서 얼마나 컨트리뷰션 할 수 있느냐가 약간 숙제가 된 거 같아요.


인터뷰 중에 비함님은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유형을 결과 중심과 관계 중심, 이렇게 두 종류를 나눈다고 말했다. (비함님의 표현을 그대로 따오자면 ‘퍼포먼스 베이스’와 '릴레이션십 베이스’)


일 외의 방면에서도 사람을 이런 기준으로 분류해본다면 비함님은 전자에 속할 것이다. 이때의 결과란 지적 자산이 될 테고. 경험을 통해 세상의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랄까.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한 행동의 동기와 과정 중에 비함님에게 눈에 띄는 점은 소속된 곳에 기여(‘컨트리뷰션’)할 수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컨트리뷰션에 대한 그 성격이 만들어진 거라고 했잖아요. 어떻게 만들어진 거예요?


전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어요.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헤헤헤 이런 성격. 싫증도 빨리 느끼고. 엄마랑 저랑 똑같은 부분인데 우리는 ‘뉴 이즈 롸잇'. 새로운 건 언제나 옳아. 그러다 중3 때 사춘기가 왔어요. 여자애 치고 되게 늦게 온 편이었죠. 그때 처음 '이제 공부를 해야겠다. 대시보드에 전교 50등까지 올라가는데 저기 한번 올라가 봐야겠다' 했죠. 목표 만들고 시간을 짜고. 그런 게 그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주체자가 된 거죠.


(인터뷰 시작 전에) 이야기했던 지도가 없이 숲을 들어가는 느낌 같은 건 가요?


네. 그래서 뭐든지 다 해봐요.


다시 돌아가자면 노조도 결과는 몰랐어요. 해봐야 미련이 안 생길 것 같았어요. 근데 깨지더라도 남는 건 있다? 아니오. '절대 내가 있는 동안엔 이거 깨지지 않게 할 거야.' 그렇게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회사랑 융통성 있게 푸는 것도 엄청 세심하게 여러 가지 전략을 짰었고요. 내가 뭔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으면 끝까지 할 수 있다는 이 작은 성공을 쌓는 게 중요해요. 대신 기간 내에 해야죠. 자리를 맡는 건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무조건 많이, 남들 안 했던 거 전부 다, 원 없이 다 해야지.


얼마 전에 맡은 행사에서는 평균 400명 온다길래 '그럼 내 목표는 500명'. 디엠 세 번씩 돌리고, 문자도 돌리고 직원들한테도 여기저기 말해라 하고. 그렇게 해야 500명 온다는 걸 알아요. 그냥 에이전시에서 '저희 디엠 보내고, 이메일 세 번 보냈습니다’ 하면 할 일 다한 거예요, 사실. 그럼, 380명 오면 뭐 중간 정도 한 거죠.


그건 싫어요. 

왜냐면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얼마나 신경 썼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는 걸 아는데 왜 안 해?


그러니까 어떤 팩터가 석세스로 가는 연결고리냐. 계속 찾는 거죠. 뭘 석세스로 볼 거냐가 중요하긴 하지만. 헨젤과 그레텔이 빵조각 찾듯이 계속 찾아서 결국 마녀의 집으로 가는 거죠.


2018년 일본 고교야구 대회가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때 고시엔 구장에서 직접 관람하고 온 비함님.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경기를 다 보았다고.


야구를 할 때도 마찬가지겠네요. 일종의 지도를 그리는 과정이겠네요.


맞아요. 사실 이런 게 재미있는 거죠. 단편적인 걸로 판단할 수 없어요. 그 세계가 뭘로 구성되어있는지 지금도 다 몰라요.


내가 야구에 대해서 말할 때, '물고기가 있나’하고 얼음에 구멍을 뚫어봤는데 망망대해가 있었다고 해요. 깜짝 놀랐다고. 이런 식의 표현을 쓰는 게 야구는 진짜 그런 느낌이에요.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아직까지 야구라는 지도는 완성이 안 된 거잖아요. 아마도 오래 걸릴 거 같고.

얼마 전에 SNS에서  ‘나이 들면서 좋은 점, 안 좋은 점 모두 있는데 안 좋은 점 중 하나가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이 줄어든다는 것’이라는 글을 봤어요.

비함님 생각에는 어때요?


저도 그런 건 있어요. 다 해봐서 다 아는 것 같고. 새로운 사람에 대한 '쟤는 뭐지?' 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고 유형화하다 보니까 안 만나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 이런?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싫은 마음, 기존의 이 평화를 깨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분명 있어요.


근데 저는 '새로운 것은 언제나 옳다’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트라이는 해봐요.


비함님이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지적인 것, 인문학적인 걸 높은 가치로 두는 것 같아요.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않고 죽는다는 건 너무 못 견딜 일 같아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이런 게 아니라 세상의 반토막도 알지 못하고, 아마 그렇게 죽긴 하겠지만, 그냥 살다가 죽는다면 18세기에 사는 거랑 뭐가 달라요?


그럼 지금의 모든 활동에서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지식을 얻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염두에 두진 않지만 몸을 쓰든 글을 쓰든 생각을 하든 어떤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죠. 뭘 해도 어느 정도의 경지까지 가야 궁극적인 즐거움이 있다는 건 알아요.


책에서 읽어서만은 알 수 없고 몸이든 뭐든 직접 해봐야 안다.


그렇죠. 책 읽기도 글쓰기도 마찬가지죠.


비함님이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좋은 기운을 주는 사람인 거 같아요.


근데 항상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거 같아요. 만약 내가 선배면 후배들한테 '내가 나이 들면 저렇게 되어야지'하는 그런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줘야 되고.


그것도 컨트리뷰션이네요.


그렇죠. 혼자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혼자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긴 하지만.


이렇게 바뀐 타이밍이 있어요. 내가 화나고 억울하고 이런 정서가 가득 차 있을 때, 남자 친구한테 특히 징징댔어요. 근데 (남자 친구) 없어지고 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누군가 나에게 징징댈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를 받아줄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나? 뭐랄까. 돈 벌면서 철드는 그런 느낌이 좀 있었죠.


또 우울하게 되는 타이밍이 분명 있잖아요. 노조 할 때 특히 그랬는데, 징징댔어요. 근데 그게 몇 번 하다 보니까 더 외로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셀프 튠업 self tune-up을 해야겠다. 그래서 계속 몰두할 걸 찾는 것도 있고 기분 좋은 영화를 본다던지. 운동을 하는 게 크죠.


그리고 지금은 30대 초반이랑 지금 완전 다른 게, 하루하루가 아까워요. 그래서 못 놀겠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도 글에 쓴 게 '낭비할 수 있는 청춘이 좋았다'라고. 그때는 술 취하고 하루쯤 날이 없어지든 말든 개의치 않았잖아요. 근데 지금은 토요일이 날아간다? 그럼 짜증 나 미쳐버릴 것 같아요.


제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도 일종의 셀프튠업이죠.


그렇죠. 그것도 되게 중요해요. 결과가 잘 나와야 할 텐데.


잘 정리해볼게요.


인터뷰를 하면서 스마트폰 앨범을 보여주는 중인 비함님. 야구 관련된 사진이 한가득이었다.

이 날 우리가 카페에서 보낸 시간은 두 시간 반. 첫 인터뷰라 시간에 대한 감이 없기도 했지만 비함님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게 더 컸다.  


이 인터뷰 프로젝트를 시작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나의 미래를 그리기 위한 참고문헌들을 늘리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이 인터뷰는 그래서 참 좋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읽으실 다른 분들께도 좋은 에너지가 전해지길.

매거진의 이전글 지도를 그리는 사람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