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카펫 매거진 3. 강효정 님 (1)
효정님은 박경리의 <토지>를 세네 번 정주행 했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좋아하는 작품으로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라던가 톨킨의 <반지의 제왕> 등등을 뽑았다. 하나 같이 호흡이 긴 책들이었다.
처음엔 선호하는 장르가 있는 걸까 싶었다. 효정님은 장르보다는 '진짜 쓰고 싶은 이야기를 작가가 충분한 시간과 지면을 할애해서 완전히 다 쏟아낸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답했다.(물론 대작이라고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서광이니 뭐든 읽는 속도가 빠르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책들을 읽어내려가는 시간은 제법 걸렸을 것이다. 그 긴 시간을 하나의 세계의 흠뻑 빠지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여기에 더해 보컬 레슨을 4년째 받고 있다고 했을 때는 놀랐다. 대체 왜? 어디 나서서 노래를 즐겨하는 사람도 아닌 것 같은데. 여전히 실력은 그만그만하다고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래도 4년이라니. 왜 이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의 시간 단위는 이렇게나 긴 걸까.
그래서 만나자고 했다. '매직카펫 매거진'은 이럴 때 '왜?'라고 묻기에 아주 좋은 핑계가 되어주니까.
안녕하세요. 소개 부탁드려요.
저는 강효정입니다.
어떤 일하세요?
회사를 착실하게 다니고 있어요.
전공은 뭐 하셨어요?
저는 산업공학을 전공했어요.
지금은 기술 기획자라고 하면 될까요?
글로벌 기술 기획 한참 하다가 신기술 평가해서 도입하는 것 결정하고, 도입하기로 하면 실제로 그 기술을 쓸 때까지의 PM도 하고 있어요.
효정님이 하는 것들 중에 저에게 제일 신기했던 건 보컬 레슨이었어요.
저도 그래요. 내가 이걸 왜 하지 싶어요.
얼마나 되었어요?
4년 되었어요. 누가 해보자길래 ‘해볼까?' 해서 시작했죠. 하다 보니까 재미는 있는데 정말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계속해야 하나 생각하다 보니까 계속하고 있더라고요.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어요?
노래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들은 잘 모르는 고민인데, 잘 못하는 사람은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잖아요. 누구한테 보여주고 싶어서는 아니고 내가 듣기에도 좋았으면 하거든요. 레슨을 들으면 뭘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걸 계속 고치죠. 그런데 이게 이렇게 먼 길인지 처음엔 몰랐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죠.
지금은 알겠어요?
옛날보다는 알겠어요. 얼마나 멀리 남았는지.
하면서 생긴 변화가 있어요?
여러 가지가 있어요. 타고나든지 연습을 하든지 둘 중 하나는 되어야 하는데 둘 다 안되니까 노래 실력 자체는 드라마틱하게 늘지 않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데 도움이 되었어요.
어떻게요?
노래에 따라서 해보면 잘 될 것 같을 때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안 돼요. 선생님도 이야기하고 나도 생각하는 건데 나를 확 드러내는 것을 엄청 부끄러워하더라고요.
감정 표현 같은 거요?
감정 표현이랑은 좀 다른데 노래한다는 것은 '내가 이런 사람이에요'를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는 행동이잖아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런데 보여주는 것 자체를 정말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익숙하지 않아서든 싫어서든 '내가 그걸 잘 못하는 인간이구나. 이걸 깨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어요.
왜냐면 저는 무대공포증도 없고 주목 공포증도 없고 사람이 300명이 있든 400명이 있든 한 시간 동안 쥐락펴락하면서 강의도 많이 했어요. '나는 그런 것에 대한 문제가 전혀 없을 거야'라고 계속 생각하면서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었던 거예요. 나라는 인간의 능력치에 대한 게 아니라 성격에 대해 알게 된 거죠.
그리고 나는 멀티태스킹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 인간이더라고요.
노래는 멀티태스킹이에요. 가사랑 음을 같이 내는 것 말고도. 예를 들면 사람마다 소리가 잘 나오는 공간, 통로가 있어요. 그 공간을 항상 그 모양으로 3분 50초 내내 유지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근육은 신경을 탁 놓치면, 뿅 하고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니까 신경을 써서 근육을 유지하면서, 음높이를 조절을 해가면서, 강약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외웠던 것들을 떠올려야 하는데 못 하는 거예요. 연습을 해서 몸에 익으면 어떤 동작은 무의식적으로 되겠지만 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니까 다 신경을 써서 해야 하잖아요.
선생님 표현에 의하면 앞의 것을 가르쳐 주고 이게 다 되었다고 생각해서 새로운 걸 가르치면 앞서 배운 것이 빠져나간대요. 지금은 선생님이 적응하셔서 한 번에 한 가지만 가르치세요. 그렇게 해서 집에서 연습해서 다 되면 다음 시간에 다시 복습. 이런 부분들이 재밌어요.
그럼 보컬 레슨 받아서 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처음에는 '슈퍼스타 K'에 나가고 싶었는데 1년 반 정도 해보니까 티브이에 얼굴이 나올 정도의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 건지 알게 되었어요. 현실 인식과 함께 그건 접었어요.
그리고 노래하는 동호회 많잖아요. 같이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도 조금 했는데 그렇게 모였을 때 사람들 간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싫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그냥 아무 목표를 두지 않고 그냥 '잘하면 좋겠다, 잘하면 뭐라도 되겠지’ 하고 있어요.
잘한다는 것은 뭐예요?
잘하는 건 잘하는 거죠.
그럼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니에요?
제가 노래를 아이유처럼 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해도. 그건 확실하거든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얼만큼인지 보이니까 이만큼까지는 잘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 뭔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죠.
그때 가면 그만둘 수 있을까요? 아니면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빈도가 줄어든다?
그만두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매주 레슨을 받을 필요는 없어지지 않을까요. 내 생각에는 아이돌도 이렇게 매주 레슨 받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연습생은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연습생 수준으로 지금 훈련을 받고 있죠. 얼마 전 연습곡이 <Speechless>였는데 드디어 칭찬을 받아서 기뻤어요. 선생님이 이 곡에서 뽑아내고 싶어 하는 걸 달성한 것에 대한 칭찬.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여가’는 경제적 활동 외의 자유로운 시간을,
‘취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단어들로는 사람들이 이 활동들에 대해 가지는 마음이나 이들로부터 얻는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 힘들다.
남는 시간에 하는 모든 것을, 그냥 재미로 하는 모든 것을 똑같이 바라봐도 되는 건가? 구분해서 볼 만한 지점은 없을까? 효정님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보컬 레슨 외에도 덕질을 비롯해서 한 게 많으셨죠. 굳이 안 해도 되는 이런 것들을 우린 다들 하고 살잖아요. 이런 활동들을 어떻게 나눠볼 수 있을까요?
제가 요즘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라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떤지 물어보고 다녀요. 예를 들어, 보컬 레슨이나 글쓰기는 노래 실력이나 글이라는 결과물이 확실하니까 말하자면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소비적 활동도 있을 테고요.
좋은 화두인 것 같아요. 제 친구들의 표현에 따르면 저는 비생산적인 활동의 거두 같아요. 넌 취미를 해도 그렇게 비생산적인 걸 하냐고들 해요.
친구들이 말하는 비생산이란 말의 의미는 자기 계발이나 경력에 도움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네요?
제 친구들의 비생산은 정말 비생산적인 걸 말해요. 예를 들어 '빵을 구울 거면 차라리 빵 만드는 걸 배워서 베이커리 자격증을 따!’, 이런 극단의 생산적인 활동을 좋은 활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니면 애를 키우거나.
하지만 저는 애가 없으니 거의 그 정도에 상응하는 생산적인 걸 하라는. 보컬 레슨도 그들이 보기에는 비생산적인 거죠. 남는 게 없으니까.
전 그게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지인들이 생산적인 거는 정말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생산적인 것이죠.
그런데 저는 생산과 소비로 나눴잖아요. 효정님은 생산과 비생산으로 나눴단 말이죠.
경제적인 의미의 생산과 소비가 아니라 내 생애 활동에서의 소비에는 생산적 소비도 많죠. 생산과 생산적인은 다른 단어잖아요?
효정님의 친구들이 말한 생산적인 것 말고 효정님이 생산적인 건 뭔가요?
생각을 안 해본 주제이긴 한데 일반적인 의미의 ‘생산적’이라는 것은 시간을 들였으면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보다 적더라도 뭔가 탠저블(tangible, 실재하는)한 결과물이 도출되어야 하는 거죠.
'비생산적’인 것은 정말 타임 킬링용 비슷하게 날아가는 시간,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아웃풋이 나오지 않는 것들, 아님 내가 그 시간 동안에 즐거웠지만 그게 끝인 것들.
'탠저블'이라는 건 내가 살아가는데 금전적인 면이든 커리어 면이든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하나요?
예를 들어 내가 몇 시간 동안 커피를 내리는 걸 계속했어요. 예전보다 커피를 더 잘 내리는 스킬이 남았어요. 그런데 이것을 일반적인 의미로 좀 더 생산적이려면 정말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는 코스에 가서 몇 시간을 내렸어야 하는 거죠.
바리스타 자격증을 딸 수 있거나 내가 몇 시간을 이수했는지 결과물이 남는다면 사회적인 의미에서 생산적이라고 인정해줄 수 있을 것 같기는 해요.
그러면 내가 그냥 몇 시간 동안 커피를 내려서 내 취향에 더 맞는 커피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생산적인 것이 아닌가요?
제가 생각하는 생산적인 것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거나 내가 스킬이 늘어나지 않아도 나 자체를 재충전하기 위해서 뭔가를 할 때가 있잖아요.
진짜 그냥 가만있는다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본다거나 정말 숨만 쉬면서 명상하듯이 고요하게 있기 위해 노력한다거나 아니면 좋은 그림을 보러 간다거나. 그 시간 자체는 날아가는 거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의 상태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던 상태에서 멀쩡한 상태로 옮겨왔을 거잖아요. 그럼 내 기준으로는 생산적이잖아요?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아요.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 이렇게 둘의 관계에서 보자면 내가 그렇게 보낸 시간은 상대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이잖아요. 아니면 그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척도가 없거나. 그렇다면 그걸 어떤 그룹에서 생산적이라고 부르기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런데 '굳이 취미생활이 생산적이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이따금 해요. 요즘은 사회적으로 그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취미도 돈이 되는 시대. 그게 맞는 접근인가? 일단 즐거워야 하는 거 아닌가? 즐거운데 열심히 해서 덕질이 되고 그러다 돈도 되면 정말 좋은데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노래로 돈을 벌 가능성은 사실 누가 봐도 제로인데 그럼 내 취미는 별로인가? 아니면 야구하는 사람들은? 야구 열심히 하고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엄청 쓰는데 야구로 뭐가 될 가능성은 없잖아요. 그럼 그건 아닌 거야? 아님 낚시라도 해서 물고기라도 잡아와야 해? 이런 생각이 들죠.
그 이야기하다 보니 느낀 건데 이번이 '매직카펫 매거진'의 세 번째 인터뷰인데 그동안 인터뷰이들한테 스윙이든 야구든 '그거 왜 해요?'라고 물어보면 다들 '잘하고 싶어서요'라고 답해요. 저는 그 '잘하고 싶은 마음'이 제가 생각하는 생산적인 활동의 핵심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우리가 흔히 생업이 아닌 다른 활동을 부를 때 쓰던 취미나 여가라는 단어 외에 요즘은 ‘사이드 프로젝트’라는 말이 있잖아요. '매직카펫 매거진’도 저의 사이드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죠.
이 단어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어서 넓은 범위로 쓰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커리어나 미래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하는 활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일 때가 꽤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또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가치 없는 행위인가? 이런 식으로요.
충분히 그런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회사 이야기를 하자면, 저는 늘 남는 에너지로 뭘 새로 해볼지 생각하고 신기술도 좋아하니까 팀원들을 세미나도 가고 이런저런 것도 해보자면서 내몰았어요. 다들 싫어했죠. 그런데 저희 팀이 하던 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과제 규모도 커지고, 그게 시장에서 핫(hot)해지면서 앞으로 2~3년 동안 그 과제를 계속하면 이러이러한 스킬을 얻게 되리라는 것도 보이게 됐죠.
이렇게 보면, 지금 눈 앞에 (그 결과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별로라고 말하는 게 맞을까? 어차피 모르고 하다가 얻어걸리는 게 인생인 거죠. 그게 잘 될지 안 될지 모르는데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서 내가 잘 될 거야' 이렇게 말하는 게 웃긴 거죠.
효정님의 이야기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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