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 그곳,
위태로운 밥상
류정환
부러진 상다리를 붙들고
네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제법 그럴듯한 밥상을 이루었구나! ─
기름기 도는 더운 쌀밥이 네 그릇
꼭 있어야 할 김치도 있고
입맛 돋구는 산나물도 한 접시
때로 일상처럼 와글와글 끓는 찌개와
흥으로 곁들이는 소주잔도 맑은 얼굴을 내밀고
가끔 세 살배기 딸아이도 올라앉아 재롱을 떠는 ─
남부러울 것도 표 날 것도 없는 차림새에
달처럼 둥근 식구들이 둘러앉은 저녁
잠시라도 마음을 놓거나 한눈을 팔면
손쓸 겨를도 없이 기울어질 목숨의 텃밭,
도시의 날품으로 가꾼 위태로운 밥상을 붙들고
울컥, 뜨거운 것이 넘어오는
목구멍 너머로 밥을 밀어 넣는다
작년부터 이 영화에 나오는 친구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들의 내력을 이토록 생생하게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유추의 폭은 프레임의 풍경을 따라 가지 못했습니다. 처음 볼 때는 어렵지 않게 보게 됐는데 이번 대전 힐링시네마 시간에는 스크린을 마주보기 힘들었습니다. 거짓말을 해야만 매운 삶을 버틸 수밖에 없는 지구의 엄마(이정현)를 보는 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엄마품에서 칭얼대고 싶은 지구도 힘든 엄마와 할아버지 그리고 여자 친구를 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감호시설에서 만나는 지구와 같은 친구들의 삶의 패턴은 비슷합니다. 패턴은 이미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불가항력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다시 현실로 나갈 때 마주하는 삶은 스스로 밀고 나가기에는 딱딱하고 차가운 실존입니다. 그 차가운 실존을 밀고 나가게 하는 에너지를 주기에는 그들과 갖는 12번의 만남은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작년 20년 동안 못 만났던 시골의 중학교 동창들이 스마트 폰에 밴드 모임을 만들면서 한참 들끓었습니다. 두 달에 한번 꼴로 모임 자리가 생겼습니다. 지구처럼 작은 시골 동네를 밤마다 휘젓고 다니던 친구들도 왔습니다. 그런데 함께 밤거리를 어울리던 친구들이 서로 ‘쓰레기’라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 생각하니 그 당시 질주했던 모습들이 쓰레기처럼 보였는가 봅니다.친구들을 보면서 한때 질주와 파탄과 무질서가 정서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그들에게 필요했었지만 정작 삶의 균열을 정리하는 에필로그 작업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에 와서 쓰레기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았을텐 데,질주의 결과를 쓰레기라고 폄하하지 않았을텐 데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한때는 구부러지고 싶은 때가 있었습니다.
일찍부터 구부러지거나 아니면 사십이 넘어서 구부러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부러진 것들을 교정한다고 우악스럽게 망치질을 해버리기 일쑤입니다. 교도소나 소년원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비록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교정을 하는 게 아니라 위로와 지지의 시설로 전환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때 구부려졌던 흔적이 원죄로 남아 쓰레기로 낙인 찍히는 게 아니라 나름 자기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고 했던 미숙함 혹은 도전으로 힘차게 껴안아주면 구부러진 것들이 펴지지 않을까요?
‘애 낳으면 철들어’라는 말을 종종 들을 때가 있습니다. 허름한 가정을 버티지 못해 바깥으로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이 문장이 단순한 종족번식을 위한 국가 혹은 집단의 명령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철들어 결혼 하는 게 아니라 애를 낳아서 철드는 가족의 구조는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도와주지 못하는 자기발견의 과정을 결혼과 가정에 떠맡겨 버리는 지금의 형국입니다. 물론 준비되지 않았지만 갑작스런 출산 때문에 결혼을 하기도 하고 열심히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철든 어른처럼 보이는 풍경이지만 선뜻 수고했다는 꽃 한송이를 건네줄 수 없는 건 실존을 유지하기 위해 유보하고 있는 그들의 아픈 내면이 언뜻언뜻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가난을 대물림 받기 싫어 15시간의 노동을 하며 청춘을 보냈던 작은 형님이 조금은 순해져서 등산도 다니고 하는 걸 보면 조금 짠해 보입니다. 한창 때는 속도 조절을 하라는 주변의 만류가 들어오지 않고 오직 가족의 안녕을 위해 독기를 품고 달려 왔을 겁니다.
애 낳으면 철들기에는 지구엄마의 나이는 너무 이른 나이였습니다. 자기의 삶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새파란 핏덩이까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아기를 가지면 당연히 모성이 부록처럼 딸려 올 거 같지만 그건 이 사회가 일방적으로 얹어주는 무게입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소시오 패스냐 아님 무책임한 모성이냐를 가지고 한동안 갑론을박이 오고 갔습니다. 영화 속 엄마도 지구엄마처럼 캐빈을 껴안지 못했습니다. 결국 참혹한 결과를 지켜보고 나서야 가슴으로 케빈을 껴안게 됩니다.
아직은 미숙한 지구엄마나 케빈의 엄마에게 무조건 적인 모성애를 강요하면서 이들을 차갑게 밀어내는 사회입니다. 모성이 단순히 개인이 감당할 무게가 아니라 가족 그리고 사회가 따뜻하게 양육을 감당하는 구조를 만들어 준다면 케빈을 소시오 패스나 괴물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케빈과 지구는 더 이상 가족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이 사회를 차갑게 노려보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