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팔로 66' 장면
손을 내밀 때가 있다.
아마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선 특히 그렇다
그들이 원치 않아도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물론 초반부터 바로 내밀면 그들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에
서로 뜸이 들 때쯤 손을 내민다.
나이와 사람 사이의 거리가 비례하는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손을 내미는 게 쉽지 않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아프니까 내 손을 잡아요’ 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젊은 친구들은 덥썩 손을 잡는다.
건강하다는 증거다.
때로는 매몰차게 물리치는 친구들도
시간이 날카로움을 뭉툭하게 만들 때쯤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때로는 오래 손을 내밀어야하는 친구들도 있다.
스무 살이 된 어떤 제자는 아직도 맘이 안 놓여 가끔씩 안부를 묻는다.
나이에 비례해서 마음이 벌떡 일어서면 좋으련만
공식처럼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마음의 밭이 아직도 척박한 탓이다.
최근에 아직 내 손길이 필요한 제자가 다녀갔다.
안부 전화에 시큰둥했던 친구가 웬일인지 이번엔 나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었다.
이제는 내가 손을 내미는 이유를 알고 있다.
씨알이 먹힌다.
그래서 다행이다.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손을 내밀고 싶지만 날카로운 방어기제 때문에 정교함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보다는 동물 혹은 자연과 사물 옆에 바짝 붙어 있는 것으로 방어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존재의 신호처럼 의기양양할 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나두 한때는 그랬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자기를 수용해야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래도 이들에게 가끔씩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회유를 하기도 한다.
신통치 않을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어린 친구들만큼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손을 내미는 이유를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만 남은 셈이다.
선택은 그의 몫이다.
평생 팔짱을 끼고서 산다고 하는데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다.
마음의 바깥으로 나가자고 하는데 주저 앉으면 어쩔 도리가 없다.
1년 동안 바깥엘 안가는 지인을
구급차를 불러서 나가게 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이후 바깥으로 나가긴 했지만
후유증이 있었다.
가까운 사람이라 그랬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영화 '버팔로 66' 장면
영화 ‘김씨 표류기’나 ‘버팔로 66’ 그리고 ‘파이란’의 공통점은
고슴도치 같은 주인공을 마음의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매개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상호작용이 있는 사랑.
상호작용에는 갈등 조금, 질투 조금, 집착이 조금씩 섞여 있다.
이마저 힘든 이들이 선택하는 방식들은 복잡하지 않는 동물들이나 사물들을 껴안고 산다.
거기에는 상호작용보다는 하나의 헤게모니만 존재한다.
그리고 사랑은 주종관계로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을 대신했던 도구들이 수명을 다하면
유기견처럼 되고 만다.
모두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손사래를 치면서 나오지 않는 이들에게
굳이 기다리면서 발 동동 구르고 싶지 않다.
아직도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구
이제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