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 40분행 방콕행 비행기
잠을 자기에는 비행기 좌석은 불친절했다.
아-그래서 비즈니스석을 사람들이 찾는구나.
방콕에 내리니 여름이다. 아란행 버스를 공항 청사에서 한 시간 기다리다가 헛수고라는 걸, 직원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들은 남의 영역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지나치게 간섭하는 우리들에 비해 쿨한 느낌도 있지만 너무 지나쳐서 때론 불친절하다. 셔틀버스를 타고 모칫마이(북부 터미널)로 향했다. 200바트를 주고 5시간의 아란행 버스에 올라탔다. 출국수속과 입국수속. 동네가게 같은 캄보디아의 입국 사무소는 무척 더웠다. 운 좋게도 시엠립으로 가는 국제버스를 얻어 탄 덕분에 가뿐하게 시엠립까지 갈 수 있었다. 간단하게 쌀국수를 먹고 밤에는 근처 시장으로 나갔다. 인종의 전시장. 온갖 먹을거리들이 펼쳐져 있고 기념품들이 난리친다. 돈에 돈을 위한 돈이 판치는 앙코르 와트의 도시 시엠립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겸허하게 하는 마음의 사원이 욕망의 사원이 되었다. 심지어는 앙코르 와트의 사원까지 어린친구들이 들어와서 1달러를 외친다. 그리고 틈만 나면 뚝뚝이 기사들이 손짓을 하면서 맛사지 숍과 쾌락의 밤을 안내하려 달려든다.
2월 4일 화
새벽 5시 기상 일출을 보러 앙코르 와트로 갔다. 뜨거운 태양의 기운을 받기 위해 아침부터 태양의 순례자들이 사원으로 향했다. 웅장하다는 느낌과 동시에 일어나는 그림은 이 웅장함을 빚어내기 위해 고군부투 했을 옛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명령을 했던 왕의 이름만 버젓이 남아 있고 벽을 올리고 땅을 팠던 그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명령을 내리기는 쉽다. 높은 의자에 앉아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황제의 오만한 눈초리가 느껴진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앙코르 와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기준은 동의어가 아니라 동음이의어다.
넓은 앙코르와트를 가로질러 앙코르 와트를 둘러싼 2km 정도의 호수를 걸었다. 도중에 원숭이 가족을 만났다. 사람들한테 닮고 닮았는지 내가 다가가도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다. 보통 인간을 보면 두려워하는 게 동물들의 상식적인 행동인데 그 예상을 뛰어 넘는 당찬 기운에 내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처음으로 필리핀을 가면서 시야가 좁았던 내 자신을 안타까워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떠나야지’라고 되뇌었다.
여행의 끝에 가서는 위대한 자연이 만들어내는 놀라움과 신비함을 경험하거나 황제의 한마디로 만들어 낸 불가사의 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찬탄을 내뱉는다.
하지만 여행의 배경에 사람이 빠져 있으면 시시해진다.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로운 환경을 만나기 위함도 있지만 사람의 만남이 먼저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한국 남편과 이혼을 앞두고 있는 베트남 식당 여주인에게 혹시 베트남 남자들은 괜찮냐라는 질문에 되돌아 온 대답이다.
인간의 생로병사 애증과 생각의 수준은 보편적이다. 다만 생활방식의 차이에서 생기는 독특한 문화만 차별점으로 존재할 뿐이다.
굳이 다 가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 부리지 말자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감당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고단한 육신을 위해 쉼표를 갖는 건 괜찮지만 굳이 유적과 유물 사이에서 헤맬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운 자연의 경관이 자극을 주긴 하지만 굳이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지친 몸과 생각을 깨워줄 휼륭한 도구들은 무수히 많다는 걸.
내게 요즘 생기를 주고 있는 도구는 야구다. 한 달에 한번 하는 야구가 기다려진다. 운동장에 서 있으면 살아있고 숨 쉬고 달린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일생에 꼭 한번이라도 오고 싶어 하는 앙코르 와트 사원에서 얻은 소득이다.
2월 6일 목
씨엠립의 마지막 날
처음부터 대단한 걸 보면 마지막이 시시해진다해서 마지막으로 미뤄 둔 앙코르 툼 타프롬 사원.
명불허전, 앙코르 툼 사원은 얼굴의 사원이라 부를 만큼 많은 얼굴의 부조가 안과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근거 없는 나르시즘은 무엇일까?
길게 이어지는 사원은 행렬을 따라가며 높은 사원 위에서 한참 밀림의 정수리를 바라봤다. 낮은 점점 뜨거워진다. 마지막 타프툼 사원.
거대한 나무들이 사원들의 기둥과 벽을 먹고 들어가고 있다. 문명과 자연의 접전이라고 하지만 우연하게 생긴 자연현상을 굳이 그렇게까지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
점심에는 시내에 있는 평양냉면 식당엘 갔다. 처음으로 북한 주민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설레였다. 한국 관광객들이 떼지어 들어온다. 종북세력으로 분류하기 좋은 현장인데 다행이 관광객들까지는 종북으로 낙인 찍지 않고 있는 건 일부 우익 인사들이 비슷한 경험을 공유해서 그런 걸까?
관광객들을 향해 웃음을 절제하는 북한 여종업원의 차가운 태도지만 아름다웠다. 직업적인 차가움이지 마음은 따듯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게 들른 게 아쉬울 정도로 처음 만난 북한주민과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나는 점심을 먹고 근처 빵집에서 딱 한권 가져 온 소로우의 ‘월든’을 읽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부터 다가오는 전율. ‘적게 벌면 적게 써라’ 하면서 자본주의 공격적인 테도에 대한 대안을 마련했던 스콧 니어링보다 소로우는 훨씬 이전의 철학자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버거워했던 내 삶에 균열을 일으킨 스승이 스콧 니어링이었다. 그를 만나고 나는 간디학교로 방향을 돌렸다.
소로우를 너무 늦게 만났다. 책을 읽으면서 쏟아지는 무수한 생각들 때문에 한 페이를 넘기기 힘들었다. 그리고 한낮 더위를 피해 들어오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읽기를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에 3일 동안 우리를 태우고 다니던 뚝뚝 기사 번나와 번나의 사촌을 만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었다. 여행은 만남이라는데 오랜만에 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게 즐거웠다. 늦은 밤까지 씨엠립의 뒷골목을 옮겨 다녔다.
2월 7일 금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버스를 기다린다. 피곤하다. 간밤에 씨엠립의 골목을 돌아다닌 후유증 때문이다. 우리를 부르러 온다고 했는데 아무도 부르러 오지 않아 두리번거리다가 교차로 근처에 있는 버스에 다가가서 물어보니 라오스 팍세로 가는 버스다. 만일 물어보지 않았다면 우리 미아 신세가 됐을 수도 있었겠다. 차를 타면서 우리의 여정이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예상을 못했다. 차를 몇 번이나 갈아 타야할지 그리고 에어컨 없는 봉고차에 짐짝처럼 구겨진 신세가 될지도 예상을 못했다. 오로지 예상했던 건 캄퐁창까지 가서 프놈펜에서 올라오는 국제버스를 타고 팍세까지 가면 끝이었다.
캄퐁창 못 미쳐서 내린 낯선 곳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봉고차 기사가 다가오더니 봉고차에 타라고 한다. 두 군데로 나눴는데 5명이 남자 담당자는 열심히 전화를 한다. 그나마 나는 편안한 자리에 앉았지만 뒤늦게 올라탄 중년의 호주 아저씨는 등받이도 없는 자리에 앉아 차가 멈출 때 까지 버티고 앉아 있어야했다. 에어컨은 거의 살랑거리는 수준. 그리고 봉고차 기사는 영어를 못하지만 옆에 앉은 그의 가족과는 열심히 수다를 떤다. 옆자리에 앉은 일본인 아가씨는 처음 자리에 앉을 때 내게 ‘니혼진’하고 묻더니 봉고차가 멈출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중에 알게 된 건 영어가 서툴러서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봉고차에는 일본인 1명 호주사람 1명 나머지는 중국인. 끼리끼리 모인다고 여행은 경계가 없을 줄 알았는데 끼리끼리 논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한국인끼리는 잘 안 논다. 태국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오는 버스 안에는 목사로 보이는 두쌍의 중년 부부가 있었다. 버스를 타면서 아는 척을 못해서 출입국 사무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인 아저씨가 보여서 말을 걸었다. 반응은 짧은 대답이 끝. 혹시나 하고 말을 걸었는데 워낙 한국인들끼리 치고받고 속여서 그런가? 같은 극성을 가진 것처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끼리 마음의 간격이 슬프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위대한 유뮬과 휘황찬란한 밤의 도시와 환락을 보러 온 관광객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아니면 침략의 역사를 방어하느라 생긴 경계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라면서 자존감을 키울 기회가 없었다. 성공이 유일한 생존이며 가문의 자랑이 되고마는 우리의 현실에서 마음을 챙기기 보다는 성공이 더 중요했다. 외국에 가면 한국인을 더 조심하라는 경고도 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같은 민족을 등쳐먹는 현실은 우리들의 탐욕의 끝을 증명해주는 거 같아 씁쓸하다.
라오스를 넘어 가기엔 봉고차가 너무 느렸다. 예정대로라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라오스에 갔어야 하는데 무책임한 봉고차 기사 덕분에 우린 캄보디아 이름 모를 국경 마을에 주저앉았다. 돈벌이가 되면 공격적으로 달라붙지만 뒷마무리가 개운치 않다. 중국인 친구들이 열심히 추궁하는 덕분에 다음 날 아침의 운송 수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만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국경 마을의 아침 시장에 둘러 우연히 쌀국수를 먹고 깜짝 놀랐다. 이번 18일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쌀국수다. 사실 여행 기간 내내 주식은 쌀국수였다. 장을 차갑게 하는 밀가루가 맞지 않지만 쌀 성분은 몸에 잘 맞아서 쌀국수로 내 배를 채웠다.
예정 된 시간 9시에 약속 장소로 가니 책임자는 여전히 우왕좌왕. 다시 실랑이 끝에 국경까지 가는 버스틀 탔다. 국경에 내려 봉고차를 갈아타는 데 2명 초과 되는 바람에 불편한 자세로 가야했다. 덕분에 중국인 여자 일행이 옆에 타게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좋았다. 얼마가지 않아 큰 버스로 갈아 탔다. 마지막 버스는 팍세에서 멈추고 게스트 하우스를 어렵게 찾았다. 다음 날 아침에 가려고 했지만 친절한 게스트 하우스 아저씨가 심야버스를 권유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심야버스를 올라탔다. 심야버스에서 일본인 친구와 중국인 친구를 다시 만났다. 명함을 건네주고 페이스북 친구가 되자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심야버스는 승객들이 누워서 가는 침대버스.
맨 뒷자리는 4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다. 내가 먼저 앉아 있는데 베트남 여자가 들어오길 래 놀라서 어- 했는데 남자 친구가 곧 이어 들어온다. 베트남 연인 한쌍과 한참 수다를 떨었다. 라오스 오는 도중 만났던 중국 친구들은 워낙 영어를 잘해서 내가 조금 주눅이 들어 버벅 거렸는데 베트남 친구들 영어회화 수준은 나랑 엇비슷해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침대버스는 독특했지만 편안하지는 않았다. 도로 사정이 안 좋은 라오스 길에 침대버스라니. 밤새 뒤척였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6시
베트남 친구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나중 베트남 여행을 대비하기 위해,
2월8(토)-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