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에서 후에로 가는 기찻길 옆 작은 토막 땅에는 채소들이 삐쭉거린다. 노는 땅을 두지 않고 채소를 심는 우리의 노인들과 닮았다. 나라가 무능해서 백성들의 먹거리를 챙기지 못해 들판과 산에서 자라는 풀들은 모두가 반찬이 되었다. 심지어 독성 때문에 위험한 싸리버섯도 일주일 물에 담그면 먹을 방법을 알아냈다. 하지만 가끔 정보에 취약한 이들이 싸리버섯을 먹었다가 탈이 나거나 신문에 부고 소식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래서 나물의 역사에는 나물을 섭취하면서 겪은 고통스러운 생체실험의 기록이 담겨 있다.
고된 식민지의 기억은 비엣남과 우리나라와는 동병상련이다. 그런데도 비엣남은 호치민과 독립운동의 지도자 덕분에 프랑스와 미국에 어퍼컷을 먹였던 승리의 역사가 있었다. 이에 반해 우리는 기회주의자들로 인해 여운영과 김구 같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거세당했다.
완만한 속도로 달리는 기차 유리창에 아열대의 스콜이 빗금을 내며 미끄러진다. 후에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호치민 주석 박물관엘 들렀다. 비엣남 전쟁을 생각하면 놀라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발생한다. 지렁이로 간주당했던 비엣남이 꿈틀거림을 넘어 프랑스와 미국을 진흙탕에 메다꽂았다. 풀잎 같은 국민이 분노하자 풀잎은 칼날이 되었다. 어떤 나라도 비엣남처럼 버틴 적이 없다. 약육강식의 순리대로 약탈당하거나 정복당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간혹 가난한 구단이 거대 구단 뉴욕 양키스를 무너뜨리는 반전의 드라마가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역사에서 반전의 드라마를 찾기는 힘들다. 경제력과 군사력의 수치에 비례해서 전쟁의 성과는 산출되었다. 그래서 여행 내내 풍경과 사람들을 마주할 때 나오는 마음의 태도는 경이로움이었다. 특히 비엣남전을 겪었을 60대 이상의 노인들을 볼 때는 고개가 숙여졌다. 놀라움 다음에 나오는 부끄러움은 비엣남을 잔혹하게 다뤘던 미국 용병의 기록이다. 용병의 댓가 덕분에 산업화를 일부 진전 시켰다는 평가가 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윤리가 배제 된 채 돈되는 일이면 닥치는대로 삼켰던 졸부 불가사리의 문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아직도 산업재해가 589명이나 발생하는 노동현장을 유지 하고 있다.
처음 타본 비엣남의 기차는 우리나라의 통일호와 비슷하다. 대학 시절 조치원 역에서 부산까지 밤새 딱딱한 의자에 기대어 갔던 적이 있었다. 나이들 수록 여행자의 배낭은 버거워서 은퇴를 바라보는 나이에는 배낭 없이 리무진 버스에 캐리어를 싣고 다녀야 할 거 같다. 배낭을 메면 알게 되는 여행의 기쁨을 누릴 체력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언제 세상을 꿉꿉하게 했냐는 듯 파란 하늘과 강렬한 햇볕이 눅눅했던 소도시의 양철 지붕과 땅 위의 풀잎 위에 있는 물방울을 인두처럼 지진다.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겠지.
비엣남을 너무 늦게 갔다. 원래 코로나가 터지던 2021년에 1달짜리 비엣남 종단 기차여행을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자체 안식년으로 설정하고 네팔 2개월 베이징-몽골-바이칼호 기차여행을 준비했지만, 코로나의 습격으로 여행 계획은 용두사미가 되었다. 그런 아쉬움이 5년 뒤에 지금의 나를 흔들고 있다.
기차는 흔들림이 심했다. 뱃속을 긁어내는 것처럼, 소화불량의 기차는 종일 그르렁거렸다. 게다가 고정형 침대 기차에다 2층 침대에 배정받는 바람에 풍경을 바라보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하노이 옆 동네 북부의 도시 하X 오토바이 투어는 힘든 여정이었다. 한계령 10개 버금가는 규모의 드라이브 일정과 진폭이 심한 상승과 하강은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그래서 기사 뒤에 바짝 앉아 가는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 의자를 꽉 붙들었다. 게다가 2일 동안 비가 내리는 까닭에 산들은 도로곳곳에 토사물을 게워냈다. 하X의 풍경은 얼얼하다는 표현이 맞다. 카르스트의 지형 특성 때문에 산들은 찰흙으로 빚은 조형물 같았다.
제대로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왔다. 고대도시 후에와 하X 투어 중에 들른 동반은 나중에 한 달 살기로 찜했다. 하노이의 골목길도 좋았다. 이번에는 맛보기 여행이었다면 다음에는 제대로 골목골목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