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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Aug 02. 2019

흑백사진

우리가 볼 수 없는 세상

흑백사진을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신다면, 왜 흑백사진을 좋아하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오로지 밝음과 어둠으로만 표현하는 흑백사진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색표현이 결핍된 모노톤의 흑백사진에 왜 매료되는 걸까요?


두 장의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흑백사진 속 세상엔 색이 없습니다. 색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색이 없는 세상은 시대를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유행하는 색감 같은 건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늘 흑과 백 사이에서만 존재합니다. 시간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흑백사진은 비현실적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본 세상은 온통 색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흑과 백의 모노톤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사진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현실은 채색되어 있습니다. 색으로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진 속 모닝커피를 마시며 조간신문을 보고 있는 여인의 옷과 카페 파라솔의 천과 반려견의 모색은 회색일 뿐입니다. 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옷을 아무리 화려하게 입어도 흑백사진 속에서는 회색일 뿐입니다. 평등합니다. 여인의 옷을 파라솔 천으로 만들었다고 우겨도 될 것 같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변화에도 둔감한 것이 흑백사진입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갑고 푸르스름합니다. 한낮에는 색이 없다가 해 질 녘엔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듭니다. 하지만 흑백사진 속엔 푸른 새벽도 없고 붉은 노을도 없습니다. 색을 온도로 표현하듯 흑백사진엔 온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닝커피를 마시는 여인'이라고 이름을 붙였기에 아침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후일 수도 있습니다. 계절이 느껴지나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흑백사진은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입니다.


색이 없어졌을 뿐인데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상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색으로 덮여서 보이지 않았던 그 내면에 다가가야 읽어낼 수 있습니다. 흑백사진은 색의 결핍으로 인해 더 다가가서 살펴보게 되고, 특정 색상에 현혹되지 않기 때문에 사진 전체를 살펴보게 되며, 서로 간의 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게 됩니다. 결국 사진을 오래 살펴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흑백사진을 볼 때면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 눈의 세상이 흑백이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해보면, 색정보가 빠져있으면 그 형태가 중요해지고, 질감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질감은 빛의 밝고 어둠으로 인지할 수 있으며,  질감의 두드러짐은 빛의 방향과 관계합니다. 빛의 방향을 살피게 되면 그림자를 알게 됩니다. 사진을 볼 줄 아는 사람은 그림자를 읽어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빛을 살피지 않아도 그림자만으로도 빛의 방향과 높낮이 및 빛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색에 이끌리지 않고, 흑백으로만 구성된 사진을 면밀히 관찰하는 눈이 생긴다면 사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빛에 대한 이해에 좀 더 본질적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흑백의 세상이라면 얄팍한 눈 속임은 통하지 않는 본질을 표현하는 진정성이 진정한 가치가 되는 세상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흑백사진이 매력적입니다.


구불구불한 스페인풍의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나무 가로등을 찍은 사진을 살펴보겠습니다. 흑백사진은 오래 살펴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씀드렸듯이, 가만히 살펴볼까요? 어떤가요? 현실 속의 이곳은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을 텐데 우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형태가 눈에 들어옵니다. 푸른 하늘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날씨도 모릅니다. 맑은 날인지 흐린 날인지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벽과 나무, 전등과 철제 모두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래서 벽의 구불구불한 능선이 눈에 들어오고 십자가 모양의 가로등과 철제의 디자인이 더욱 선명해져 옵니다. 담벼락의 끝을 보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긴 물체가 보입니다. 색이 없기에 사진 속에서 자연스레 존재합니다. 굳이 지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흑백사진은 누구를 잘 내치지 않습니다.


색으로 치장할 수 없는 흑백사진은 평등해 보입니다. 우리 눈이 흑백사진처럼 세상을 본다면 색으로 치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겁니다. 색으로 도포한 눈속임도 그 진품의 물성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외형적인 모습에서의 가면뿐 아니라 내면 또한 가면을 쓰고, 때론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면이 내면화되어 있습니다. 흑백사진의 매력은 세상의 민낯을 담아내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매력적인 흑백사진들은 모두 민낯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진 찍는 날입니다. 친구는 청담동 미용실에서 예쁘게 메이크업을 받고 한껏 멋을 부리고 나타납니다. 나는 대충 홈웨어 같은 헐렁한 티셔츠에 맨얼굴의 초췌한 모습으로 스튜디오에 갑니다. 그 친구보다 사진빨 잘 받게 촬영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문하면 됩니다.


"흑백으로 찍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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