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은 늘 겉절이
오늘은 숙성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묵은 김치나(묵은지) 삭힌 홍어를 이야기할 때 그 숙성 맞습니다. 사진도 숙성이 될까요? 사진을 촬영하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 사진 속 주인공들은 모두 늙어 있겠군요. 사진 속 주인공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합니다. 사진 속 주인공뿐만 아니라 아날로그 필름이라면 필름도 세월의 흐름에 다소간 변화를 겪습니다. 인화된 사진은 아무리 잘 보관해도 세월의 흔적은 남기 마련입니다. 같이 늙어가는 거죠. 하지만 디지털은 늙지 않네요. 디지털 이미지 속의 우리는 변했는데 디지털 파일은 여전히 겉절이네요. 디지털이 개발된 역사가 깊지 않다 보니 그나마 디지털 파일 자체에서 세월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부족한 화소 정도네요.
'사진은 세월이 무게를 실어준다'는 말을 수업 때 가끔 할 때가 있습니다. 그냥 오래되기만 해도 사진은 그 촬영된 내용과는 상관없이 힘이 생깁니다. 사진 속의 현실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시공간이라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별 것 아닌 것 같은 장면을 기록해도 세월은 반드시 그 사진에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그것이 B컷일수록 더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때론 촬영자의 시대착오적인 감각은 지금의 B컷이 세월이 흐른 뒤에 A+컷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필름 자체가 세월을 견딘 흔적을 남긴다면 보존이라는 측면에서는 부족하지만 사진은 더 깊어집니다. 하지만 디지털은 세월을 견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네요.
사진에 무게를 실어주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사진을 오래 묵혀둘 여유가 없다면 오래된 것을 촬영하는 것입니다. 새것을 촬영할 때와는 다른 힘이 느껴집니다. 사진 속 내용물 자체가 오랜 세월을 견뎌온 흔적을 담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끔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합니다. "지저분할수록 사진은 잘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촬영되지 않은 오래된 필름으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는 피사체를 담아내는 작업은 어떨까요? 찍는 순간 필름과 그 내용물 모두 다소간 숙성된 상태가 되겠군요.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은 아날로그 필름처럼 오래 묵혀둘 방법이 없습니다.
위의 사진은 필름으로 촬영했습니다. 폴라로이드 즉석 필름입니다. 유통기한을 2년 넘기고서 촬영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새 폴라로이드 필름으로 촬영한 것보다 더 노란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유통기한을 넘기면서 색온도를 유지할 근력이 빠졌나 봅니다. 필름도 늙은 거죠. 폴라로이드는 일반 네거티브 필름에 비해서 보존성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필름 자체도 유통기한이 짧지만, 촬영한 사진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캔했습니다. 늙지 않는 디지털로 세월의 흐름을 멈추어 버렸습니다. 조금 안심은 됩니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것이 인생무상일 텐데 욕심을 부려 세월을 디지털 사진으로 멈추어 세워 벼렸습니다. 폴라로이드는 지금도 세월을 견디며 늙어가고 있습니다.
진품과 가품이 사라진 시대라고 말합니다. 원본과 복사본의 경계가 무너진 디지털 세상이죠. 현실과 가상의 경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원본 자체의 아우라도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자연이 만들어주는 물성 있는 현실은 세월 속에 자연스럽게 숙성되어, 우리가 늙어가고 결국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잊힐 것들은 잊히고 새로운 것들은 다음 세대를 위해 새롭게 다시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낸 디지털 세상은 늙지 않습니다.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는 가상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물성 없는 디지털 세상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죽지 않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최고의 걸작인 디지털 세상은 존재한 적도 없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자연은 존재 자체가 없는 디지털을 숙성시킬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