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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Nov 21. 2021

[책] 어느 작가의 오후 / 페터 한트케

어느작가의 오후 / 열린책들 / 저자 : 페터 한트케 / 2010.6.30


막연히 나의 노후는 글쓰기를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글쓰기의 행복감과 고통을 나는 동시에 느낀다. 그 글의 한계를 매번 느끼면서도 그 굴레가 있어 글은 내가 넘어갈 수 있는 담벼락을 제공해 준다. 가끔씩 힘겹게 담을 넘어 탐험하면 기분이 맑아짐을 느낀다. 맑아진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눈물일 수도 있고, 멍 때리기 일 수도 있고, 웃음일 수도 있다. 담을 넘어서 느끼는 모든 느낌은 이곳에서 말하는 기쁨 혹은 슬픔의 느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체력이 비축되면 힘겹게 담을 넘어 그 공간의 감정을 느끼곤 하지만, 담에 문을 내어 조금은 자유롭게 옮겨 다니고 싶은 맘이다.




페터 한트케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구독하고 있는 안목 출판사의 블로그의 글을 읽고서다.https://blog.naver.com/anmocin/221921607024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사진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작가의 제자이기도 한 박태희 작가의 출판사다. 사진 전문 출판사인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가끔씩 그녀의 사진과 글에서 휴식을 느낀다. 이 책이 어디서 와서 내 책장에 꽂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덕에 나는 필립 퍼키스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박태희 작가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진은 닮은 듯 다르다. 그녀의 글에 댓글을 달고 [어느 작가의 오후]를 주문했다. 그녀의 사진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 [세잔을 찾아서/페터 한트케]는 다음 독서 목록에 적어두었다.


사진강의 노트저자필립 퍼키스출판눈빛발매2005.02.25.
사진강의노트저자필립 퍼키스출판안목발매2019.02.24.



어느 작가의 오후


앗싸


페터 한트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치 BTS가 빌보드 1위를 하고서야 나의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고, 밥 딜런의 음악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가 노벨상을 받은 이후다. 늘 세상의 흐름에 끌려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이상한 자존심인지 오래전 학창 시절부터 지나치게 유명세를 얻은 책과 영화 작품들은 일부러 피하곤 했다. 내가 먼저 그 진가를 알아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혼자만의 자책이었던 것인지, 자기만의 필터 없이 트렌드에 휩쓸리는 것처럼 보이는 무리에 속하기 싫어서인지... 그래서 난 내 또래는 누구나 보았을 영웅 본색 류의 홍콩 영화도 본 적이 없고, 교실에서 돌려보던 드래곤 볼 만화책도 만져 본 적이 없었다. 남들이 싫어하는 지루한 영화 보기를 좋아했고, 극장에도 걸리지 못한 B급 영화에 감동하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역시 인싸가 되지 못하고, 맴도는 인생을 살고 있긴 하다.



작품


작품을 하는 공간인 집을 벗어나 길을 걸으며, 다른 세상과의 연결을 시도하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에 얽매인 자신을 발견하며, <작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안목 출판사의 박태희 작가가 이 부분을 언급했고, 그녀의 언급이 없었다면 나는 그냥 작가가 중얼거린 말처럼 귀담아듣지 않고 넘겼을 지도 모른다. 나도 이 부분을 언급해본다.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주요한 것, 즉 특별한 속도 조절용 바퀴 없이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어느 작가의 오후 40p)


맞다. 가끔 책을 읽을 때 재료에 대한 생각에 빠져 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책 역시 작가가 길을 가면서 묘사하는 재료들에 현혹되어, 다시 페이지를 뒤로 가기 해서 구조를 살피며 읽었다.


그는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작가의 오후 40p)

박태희 작가가 언급한 부분이다. 난 이렇게 댓글로 답변을 달아놓았다.


환상


그가 작가라는 인물로 도시를 산책하며 써 내려간 글을 따라가면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그처럼 걸었다. 나는 미래의 전사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공격하는 적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아군으로 위장한 이들이 있었는데, 나는 하마터면 우리 편으로 받아들일뻔했다. 바닥에 그러진 주차선은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우주로 나는 떨어지고 만다. 주차선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보도블록의 선을 피해서 걸어야 한다. 나는 그 좁은 틈으로 걸어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연석을 따라 적들의 시선을 피해 빠르게 걸었다. 연석의 폭도 넓지는 않아서 자칫 시커면 아스팔트 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나의 게임은 끝이 났다.


훈련소에서 나는 영화를 찍었다. 군화발이 날아왔고, 소총을 머리에 이고, 앉은뱅이 자세로 구호를 외치며, 모래 먼지 속을 기다시피 쪼그려 걸어가야 했다. 먼지는 좀 더 많아야 만족했고, 군화 발로 걷어차 일 때는 좀 더 실감 나게 나가떨어져야 했다. 나의 귓가엔 영화 속 백그라운드 뮤직이 흘러나왔고, 나의 모든 훈련은 슬로 모션이었고, 힘들수록 멋졌고,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땀을 닦을 때도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 난 그렇게 버텼다.


4장의 작가와 함께 도심 속을 걸으며, 난 이런 것들이 떠올랐다.



공허


나 역시 공허했다. 길을 걸으며 작가처럼 세상을 바라본 적은 어릴 때가 전부였던 것 같다. 요즘은 길을 갈 때도 목적지만을 생각하며 간다. 늘 다니는 출근길도 가는 길바닥과 나의 스튜디오 입구가 내가 묘사할 수 있는 출근길의 전부인 것처럼 집과 스튜디오는 압축되어 있다.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 길을 물어본다. 근처에서 그가 여기가 어디라고 말하지만 난 몰라서 내가 아는 것을 말해줄 때가 있다. 나는 사진을 하고 있으면서도 작가처럼 세상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일상은 이야기가 없다. 작가의 공허와 나의 공허는 뭔가 달라 보이지만, 나 역시 공허하다. 그의 글을 쉽게 따라가지 못한 것도 그래서인듯하다. 길을 걸으며 작가는 상세히 묘사하고 있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려지지 않는다. 그려본 적이 너무 오래되었다. 작가는 매우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에겐 이곳의 언어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 언어의 의미가 작가의 눈 속으로 그대로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꼈다.


무당


나는 마치 무속인이 되어 굿을 하듯 의뢰인에 빙의되어 혼란스럽고 힘겨워하고 있다. 그의 글에 몰입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묘사와 이야기에 지쳐가고 나의 글도 작가처럼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작가의 몸부림은 느껴진다. 내가 사진으로 몸부림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읽히는지 작가의 글이 휘청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피곤하다. 숨이 막혀온다. 더 이상 작가의 너저분한 느낌의 흐름을 쫓아 읽어내려가기에 가슴이 심하게 답답해져오는 것을 느낄 때 다행히도 글이 끝났다. 심호흡을 했다. 나에겐 버거운 책이었다. 누군가에 빙의되어 굿을 한판 벌이고, 그 집안의 지난한 이야기와 술판에 밤을 지세우다. 탈진해버린 무당처럼 나도 기운이 빠져버렀다.


역자해설 중에서


한트케는 모든 존재 현상들에 대해 이제까지의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의 직접성을 표현하는 것을 창작의 의도라도 밝히고 있다. (141p)






내 생각


언어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작가의 몸부림은 계속 느껴졌다. 그래서 언어를 잃어버려 글을 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던 것 같다. 언어라는 것은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의미 부여된 약속의 표지라서, 언어를 구사하는 순간 그 의미의 굴레에 갇혀 선입견이 생기게 된다. 현실과 환상을 혼동하는 정신분열 증상 같은 글쓰기를 하는 것도 쓸 수밖에 없는 글이 선입견의 굴레에 자동으로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 두려워 마구잡이 글쓰기로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쉽게 언어의 굴레에 갇히지 않게 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어디 글만 그런가? 필립 퍼키스 할아버지도 이렇게 말한다. 의미에 대한 생각은 조금 미루고 사물 자체를 바라볼 것을 강조하고, 그러기 위해서 천천히 바라볼 것을 조언한다. 롤랑 바르트는 어떤가? 종국에 그는 사진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설명을 한다면 결국 언어의 힘을 빌려서 할 텐데, 그것이 글이건 말이건..., 결국, 언어의 영역에 갇혀 버리게 되니, 그 설명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절대 충분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 작품이 진짜로 말로 혹은 글로 깔끔하게 설명된다면, 그리고 작가가 그것을 의도한 것이 맞는다면, 그다지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냥 글로 표현하면 될 일이다.


일종의 언어의 선입견에 대해 다른 식으로 언급한 철학자와 예술가는 또 있다.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고, 자신의 작품을 추상화라고 구분 짓는 것 자체도 거부했던 마크 로스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하라'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도 그랬다.



나 역시 틀 밖을 말하면서 언어의 굴레를 언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언어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 약속한 문명의 모든 것들이 굴레를 가진다. 그 틀을 벗어난 곳으로 가는 통로를 찾고 드나는 것이 그나마 삶을 버티는 방법이고, 그 방법으로 예술이란 도구를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통로까지 안내하는 여행 가이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통로를 개척한 철학자 혹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번역하여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한트케도 글을 쓰는 것이 작가의 내면의 무언가를 번역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은 틀 밖의 더 큰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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