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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Mar 09. 2022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



책을 읽다가 다시 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알면서도 다시 한번 저자의 이름을 확인해 보려고 겉표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강신주 철학자에 대한 알려진 이미지 때문이겠죠. 방송에서 강연을 접하고 그 이후에 나온 그의 저서들을 보면 강신주의 말투가 고스란히 책 속의 문체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조금 낯설게 읽혀서 저자를 확인했습니다. 이 책에서의 강신주는 상당히 조심스럽고 부드럽습니다. "그래요? 이렇게 하세요~", "떠나세요~", "이혼하세요~, 그게 답이에요.", "집을 나오세요~ 그래야 돼요" 등의 독설적인 사투리가 섞인 그의 어투는 없습니다.


총 48명의 선각자의 이야기가 단편으로 구성된 일종의 해설집입니다. 쉽지 않은 원문을 강신주가 다가가기 쉽도록 안내합니다. 각각의 단편은 책 한 권으로 분류해도 충분하지 않을 내용들이겠지만, 그래서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할 테지만 이 책을 통해서 전체를 개관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내가 더 깊게 들어가고 싶은 부문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었습니다. 책의 말미에 [더 읽어볼 책들] 이란 섹션도 참고할까 합니다. 하나하나를 모두 이해하고 학습하듯이 읽어나간다면 피곤하겠지만, 옛 선조들의 이야기를 평상에 누워서 흘려듣듯 읽어나가면서 순간순간 마음에 와닿는 구절들이 생기면 잠시 멈추어서 나의 이야기를 적어볼까 합니다.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은 모르지만, 나의 마음속에 콕 박혀있는 영화가 있지 않나요? 대사까지도 떠오르고 말이죠. 그 영화를 타인과 공유할 때는 조금 힘들지만, 감독과 영화배우의 이름을 모른다고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니까 말이죠. 그렇게 나의 마음에 와닿는 이야기가 있는지 생각하면서 계속 나를 떠올리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해탈의 지혜

혜능, [육조단경]


[닥치고 정치]에서 '무학의 통찰'이란 표현이 떠오릅니다. 달마가 시조인 선불교의 여섯 번째 스승인 육조 혜능 스님의 일화가 콕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이것이 '무학의 통찰'이구나 싶었죠. 혜능 스님의 일화와 어록을 기록한 책이 [육조단경]이더군요. 책에는 선불교의 다섯째 스승인 홍인 스님이 여섯 번째 스승을 선택하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왜 혜능 스님이 여섯 번째 스승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지 두 글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깨달음을 써보라는 일종의 시험을 치렀나 봅니다.


이 몸이 바로 보리수. 지혜의 나무

마음은 맑은 거울.

날마다 힘써 깨끗이 닦아야 하리라!

먼지가 앉지 않도록.


-신수 / 육조단경


혜능 스님은 일자 무식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하다가 늦게 절로 돌아와서는 동료 스님이 읊어준 신수의 글을 듣고서 신수의 글 옆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에는 (거울의) 틀이 없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모이겠는가.


-혜능 / 육조단경

-철학이 필요한 시간 66p-


신수의 글을 보면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관념 속의 구호만을 외치는 진보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겠죠. 그래야 혜능 스님의 말씀처럼 마음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





신이란 바로 나의 생명력이다!

최시형, [해월신사법설]


예술가의 삶이 인문정신에 기반하고, 최시형이 말한 '영기'를 가진 사람이 곧 예술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을 긍정하는 적극적인 정신이 '영기靈氣'라고 합니다. 영기라는 말 자체가 신은 내 안에 있다는 삶에 대한 적극성을 이미 담고 있네요. 앞선 포스팅에서 예술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었습니다.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환자'라고 했습니다. 사진은 틀 속에 무언가를 채우는 예술처럼 보이지만 틀 밖의 더 큰 세상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틀 밖의 결핍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사진작가일 수 있습니다. 그 틀이 곧 내 안의 틀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의 사각 틀의 안팎 모두가 자연이듯이 논리와 비논리의 관념 두 영역 모두가 결핍되지 않을 때 온전한 '나(我)'가 됩니다. 비언어적인 영역, 비논리적인 세계를 역시나 논리적이지 않은 도구를 활용해서 표현하고,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 속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삶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영기'를 가진 예술가인 것입니다. 틀 밖의 세상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도 예술가들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섭니다. 예술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말이죠. 그 영역을 영적인 영역으로 신에게 모두 위탁한다면, 즉 내 안에 있는 '영기'를 외재적인 '영기'인 신에게 의지하려 한다면, 예술가의 창의성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실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틀 밖의 세상도 분명히 '나(我)'입니다. 그 영역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은 나를 치유하게 합니다. 예술가들은 그렇게 버티며 살아갑니다. 은근한 적극성으로 말이죠. 온전히 나를 찾으면서 말이죠. 예술로 행하는 인문정신이자 인문학이겠습니다.




생각의 발생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글을 쓰도록 만든 키워드는 '낯섦' 이었습니다. 사진에서도 '낯섦'이란 키워드는 낯설지 않게 종종 등장합니다. 하이데거의 말에 의하면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늘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가끔 내가 퇴근길에 어?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내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사무실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세부 과정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의 무의식으로 발길은 집으로 향합니다. 이런 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배려함' 이겠군요. '손안에 있음'이라는 표현도 배려함과 연결해서 사용하더군요. 맞습니다. 우리 동네는 나의 손바닥 안에 있죠. 익숙해서 특별할게 없을 정도죠.


하지만 가끔씩 휴일에 이런 짓을 종종 합니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내가 사는 동네를 바라봅니다. 조금 천천히 바라보면 은근 효과가 있습니다. 한국식 버스에서 울리는 승하차 소리, 버스 옆면에 붙어있는 정류장의 한글 명칭, 한국에만 있을 것 같은 가로수 은행나무, 처음 보는 것 같은 보도블록의 모양과 육교의 특이한 모양 등 매일 다니던 우리 동네의 모습이 이국적으로 다가옵니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낯선 도시에 홀로 앉아 있는 나는 배낭여행족처럼 느낍니다. 이것인가 봅니다. 낯섦과 조우하는 순간 우리의 생각이 깨어난다고 했던가요! '눈에 띔'이란 말로 하이데거는 낯섦을 표현했고, 내 손바닥 안에 있을 수 없는 낯선 공간을 하이데거는 '손안에 있지 않음'이라는 말로 상징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사진을 했어도 잘 했을 듯합니다.


사진을 할 때 대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훈련을 하면 사진을 깊게 바라보게 됩니다.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찍어야 하는 사진은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통용되는 약속된 의미의 굴레에 갇혀 '배려함'에 머물러 버리게 됩니다. 낯설게 바라보는 훈련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도 뻔히 알고 있는 그 사물의 용어와 의미에서 벗어나서 낯설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로지 시각적인 정보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진에서는 이럴 때 빛과 그림자에 집중하게 되고,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콘트라스트(contrast)를 살피고 결국 사물의 질감(texture)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본질에 다가가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생각이 깨어나게 됩니다. 사진 속에도 하이데거의 철학이 숨어 있군요.




지적인 통찰 뒤에 남는 것

지눌, [보조법어]


지눌 스님이 말한 [돈오점수]의 가르침은 사진을 하는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진가로서, 사진 선생님으로서 나의 나아갈 방향을 인지(앎) 하고, 깨달음처럼 다가오는 예술가로서의 신념은 말 그대로 '깨달음처럼', 딱 거기까지입니다. 이것을 관념 속에서 느끼고 깨달았다고 해서 진정한 사진가가 되는 것은 아니고, 사진 선생님 계의 부처가 될 수도 없습니다.

*[돈오점수] : 갑작스러운 깨달음 뒤에 점진적으로 수행하는 것

하지만 '깨달음처럼'에 이어서 실천을 뒷받침하는 순간, '처럼'은 사라지고 '깨달음'이 됩니다. 지눌 스님이 말한 '돈오' 다음의 '점수'가 매우 중요한 이유입니다. 내가 나아갈 방향을 알면 무던히 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오'가 없는 '점수'는 의미가 없는 목표 없는 고된 방황일 뿐입니다. 아무리 카메라를 들고서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닌다고 해서 고수가 될 수 없습니다.


당구를 예로 들면, 공이 굴러가는 길을 보는 눈이 '돈오'라면, 당구 채를 손으로 들고 기술적으로 그 방향으로 밀어 넣는 기술 연마가 '점수'라 하겠습니다. 사진을 배우러 온 수강생들에게 '사진은 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돈오'의 깨달음이 없이는 '점수'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적 이론의 습득이 사진계 무림의 고수가 되도록 도와주지 않습니다. 명확한 기준이 선 다음에 꾸준히 중심을 잃지 않고 기술적 이론도 익히고 촬영 기술도 연마하면 고수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준이 분명히 서면 카메라의 조작법과 상황에 따른 촬영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필요하겠지만, 엄청난 수행이 있어야 사진 고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돈오가 끝나는, 즉 나만의 기준이 명확해지는 그 순간 고수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보조법어]의 지눌 스님의 말씀이 사진에도 닿아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비록 뒤에 수양을 남겨두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먼저 단박에 깨달았기 때문에, 악을 끊는 경우 끊기는 하지만 끊음이 없고, 선을 닦는 경우도 닦기는 하지만 닦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참된 닦음이요 참된 끊음이다. [보조법어/지눌]


사진을 제대로 수행하면 부처가 될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다한 후에 천명을 생각하다

맹자, [맹자]


맹자 편을 보면, 남송의 유학자 호인(1098~1156)의 저서 [독사관견]에 나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란 말이 다시 나의 가는 길을 멈추어 세웠습니다. 뜻은 몰라도 한 번쯤 들어본 말입니다. 뜻을 풀이해보면 사람의 일을 모두 다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성공한 자들이 하늘의 뜻에 맡깁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진인사 대천명'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에 벌어지는 일은 하늘의 뜻이고,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겸허히 결과에 승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공한 자들이 생각하는 '(행) 운 '이라는 것도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성패는 70%가 운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성공한 자들은 70%의 운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30%의 재주를 부리고 난 후에야 70%의 운은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일종의 운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요건인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자만하지도 실패했다고 낙담하지도 않는 것이 '진인사대천명'이라 생각합니다. 늘 겸허한 마음으로 삶을 긍정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인사대천명'이라 생각합니다.


'사진은 우연의 결과물이다'라는 말을 강의할 때 종종 합니다. 인생 샷 하나 건졌어? 오늘 사진 한 장 건졌는걸?이라는 표현을 사진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기술이나 노력보다는 하나 얻어걸렸다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사진뿐만 아니라 예술 전체에 있어서 '우연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운칠기삼의 '운' 이 아니라 호인의 '진인사대천명의 '천명'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예술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오지로 위험을 무릅쓰고 출사를 떠나지 않는다면 '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표지를 장식한 '아프간 소녀'라는 사진으로 유명한 '스티브 맥커리'도 스스로 이야기합니다. 수천 장의 사진을 찍어야 한 장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어쩌다가 운이 좋아서 나에게 내셔널지오그래픽 표지 사진이 찍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정호승 시인이 잡지사에 근무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사진기자와 함께 뵙기 어려운 성철 스님을 만나 뵈러 다녀갔다고 합니다. 사진기자가 인터뷰 촬영을 위해 한두 컷을 찍으면 족할 사진을 하도 여러 장을 찍길래 성철 스님이 '뭐 이리 많이 찍노?'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멋지게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한다고 정호승 시인이 말씀을 전했더니, 성철 스님께서 사진기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럼 "찍으려거든 천 번을 찍어라" 역시 성철 스님 다운 답변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우연의 결과물임에 분명합니다. 다만 그 자연이 준 우연의 선물을 얻으려면 천 번을 찍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진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라는 말도 자주 합니다. 훌륭한 사진작가가 멋진 화보 촬영을 합니다. 나만의 조명 연출과 나만의 카메라 무브먼트로, 촬영하는 순간, 감각적인 앵글로, 잡지사에서 만족할 만한 멋진 결과물을 완성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 작가는 "어쩌다 한 장 건진 거죠"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하늘의 뜻에 맡기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입니다. 왜 그럴까요? 완벽에 가까운 기술적인 능력과 뛰어난 감각까지 지닌 포토그래퍼가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겸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완벽하게 촬영 세션(session)을 준비하고 카메라 앞에 섭니다. 하지만 촬영을 위해 셔터를 누르는 그 찰나의 순간에 자연의 변화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 무수히 많은 변수들을 우리는 계산하지 못합니다. 멋진 사진을 한 장 건졌다면 그것은 자연과의 협업입니다. 자연이 완성해준 선물입니다. '진인사'를 했고, '기삼'을 한 것에 대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카메라의 셔터는 겸허한 마음으로 눌러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다면 책임도 없다.

칸트, [실천이성 비판]


120p에 칸트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도입 문장은 '전철을 탔다'로 시작합니다. 순간 대학교 때 같은 과 선배 형이 생각났습니다. 그 형이 전철을 타고 등교할 때 생긴 일입니다. 아침 출근시간대의 꽉 찬 지옥철을 타고 학교로 오던 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움직일 수도 없이 꽉 들어찬 전철 안에서 형이 실수로 앞사람의 발을 밟았다고 합니다. 선배 형은 키가 작은 편이었고, 앞에 있는 사람은 형의 머리 위로 턱이 올 정도의 키 차이가 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형이 앞사람의 발을 꾹 밟는 순간, '아~!!!' 하는 소리를 앞사람이 질렀고, 그 사람은 형을 내려다보았다고 합니다. 형도 쳐다보길래 지지 않고 올려다보았다고 합니다. 키 큰 그 사람은 형한테 만원 지옥철에서 눈빛으로 묵언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형의 말이 대박이었습니다. 칸트가 형으로 환생할 줄 알았습니다. 형은 형보다 키가 훌쩍 큰 그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원하냐?" 대박입니다. 칸트가 따로 없습니다. 내 자율의 의지로 당신의 발을 밟은 것이 아니니, 지옥철에게 불만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말할 것이지? 왜 나한테 그러냐는 뜻입니다. 나의 자유로운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니 나에겐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그 자체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는지 모릅니다. 형은 제법 단신인데 강단이 좋고 굉장히 유쾌한 선배였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미안하다는 말을 원하냐?"라고 말하면서 서로 딱 붙어있는 상황에서 한 사람은 올려다보고 한 사람은 내려다보면서 그 사람은 배로, 형은 어깨로 서로 꿈틀 꿈틀 몸싸움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형은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인간이 자유로울 때에만 의미가 있다'라고 말하는 칸트의 후예임이 분명합니다.


이성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순수하고 실천적인 법칙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적극적 의미에서의 자유다.

그러므로 도덕 법칙은 다름 아니라 순수 실천 이성, 다시 말해 자유의 자율을 표현한다.

-실천이성 비판-






집단의 조화로부터 주체의 책임으로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레비나스, 편을 읽으면서 앞부분에 나왔던 임제 스님의 임제어록이 떠올랐고, 칸트까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차이 differnce'를 인정해야 한다.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린 서로 다를 뿐이다. '개성 individuality'을 존중해야 한다. 등의 말을 자주 듣습니다. 모두 타자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몰개성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말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다른 사람 간의 관계가 어때야 하는 걸까요? 레비나스는 이런 타자와의 관계가 외재적이라고 말하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책임 Responsiblity'의 논리로 풀어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유의지로 행하는 것에만 책임이 따른다고 했듯이, '책임'이 무엇인지를 풀어내면 자율의 의지로 행하는 '책임'있는 주체자들의 사회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Responsiblity 책임이란 영어의 단어를 해부한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레비나스는 나와 다른 사람과 대면하는 윤리적 관계를 책임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책임이란 두 개의 영단어 (Response 응답하다 + Ability 할 수 있음)가 합쳐진 말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말한 책임 있는 주체이고 타자와 나와의 책임 있는 관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임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책임 있는 개별 주체로서 이 땅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개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과 차이가 사라지게 됩니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형성된 집단성이 전체주의가 되고 곧 파시즘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있는 자로 인식하는 것'.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공감의 관계일 수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공감은 유사한 생각과 욕망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서로 마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다른 생각의 주체자로서 반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책임 있는 주체자로서의 개성을 발휘하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평온한 가정과 화목해 보이는 가정은 파시즘이 팽배해 있는 가정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시끌 시끌한 가정이 오히려 타자와 나의 주체적인 관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면서 살아가는 또 다른 의미의 화목한 가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도 착한 자식이 어느 순간 돌변하여 가출도 하고 가정의 화목을 깨부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동안 반응하지 않았던, 다름(difference)을 드러내지 않았던, 착한 아들/딸은 어느 순간 자신의 다름(difference)을 폭로하게 되고, 가족들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때 아들/딸은 임제 스님의 말을 실천하며 온전한 주체자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진짜 어른이 되는 순간이겠죠.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해야겠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조화를 위해 참는 것은 민주주의에 다가가는 길을 멀게 만듭니다. 지금 일본 아베 정권의 '맘대로 정치'는 바로 일본 국민들이 주체자로 책임 있는 반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타자에 대해 다름/차이(difference)를 인정하고, 자율의 의지로 응답하는 책임 있는 나만의 행보가 임제 스님이 말한 해탈이라 생각합니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샤르트르, [존재와 무]


상대적 사랑 Vs 절대적 사랑

샤르트르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절대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비교 대상의 우위로 선택된 사랑이 아니라 나를 그저 나이기에 온전히 절대적으로 선택해주길 바란다는 것이죠. 사르트르는 저서 [존재와 무]에서 물건과 달리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미리 정해진 '본질' 이 없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갈구하지만 '무'인 인간은 언제든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선택을 갈구하지만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자유=>책임=>사랑은 한 몸이 되어 하나의 흐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유의지로 나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나를 절대적인 선택의 대상으로 여겨주길 바라지만, 불안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나 역시 사랑하는 이를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지 못하는데 상대방이 나를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불안감일 수 있습니다.


자유=>책임=>사랑이 한 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오히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선택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샤르트르가 말한 개념 그대로의 절대적 선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역시 상대적인 선택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비교 불가한 사랑의 대상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절대 서로를 등지고 떠나지 않게 되는 '절대적인 사랑'이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샤르트르가 말한 불길한 직감 같은 것은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임 responsibility은 응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부가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겠습니다. 같은 곳을 보는 줄 알았는데, 상대방은 딴 곳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런 불안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서로 마주 보고 응답하겠습니다. 서로가 응답하지 않으면 다른 곳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말과 몸의 터치에 긍정적인 반응이 쌓이고 또 쌓입니다. 서로의 말과 행동에 긍정적인 반응을 지속하면서 신뢰는 쌓이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섬광처럼 얻어지는 반응이 아닙니다. 나의 말과 행동에서 오는 태도 attitude는 사랑하는 대상과 마주하는 세월만큼 성숙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짓 반응이어서는 안됩니다. 솔직한 반응이어야 합니다. 응답하는 것은, 반응하는 것은, 언제나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논쟁할 수도 있습니다. 다툴 수도 있습니다. 안 싸우는 부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반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다툼을 회피하는 무관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각자의 주체자로서 다름 difference 속에서 서로 응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관심 indifference 은 서로 마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마주 보고 응답하는 책임 responsibility 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유와 사랑만 남습니다. 자유의지로 딴 곳을 바라보면 자유와 사랑의 등식은 깨지기 쉽습니다. 가운데 위치한 책임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무관심이란 영단어를 풀이하면 답이 보입니다. in (아니다 not) + difference (다름/차이) '다름'이란 말과 '아니다'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무관심은 개성 있는 주체자로서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 무관심은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술책입니다. 반응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악플 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인 것과 비슷합니다. 차이가 없다는 말이 '무관심'이란 말로 사용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나의 행동과 말에 늘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해주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함께 마주 보며 살아온 세월 속에 고스란히 기록된 서로의 반응들을 타자는 이해할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습니다. 상대적 선택의 기회는 언제든 열려있지만, 샤르트르의 말대로 본질을 규정할 수 없는 '무'의 존재인 인간은 언제든 자유의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매력적이고 멋진 이성과 상대적 경쟁을 벌여도 나의 배우자를 절대적으로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상 실현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해 책임 있는 민주시민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듯이, 진정한 사랑도 '절대적인 선택'이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라 아니라,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적인 우세가 절대적으로 지속될 수 있도록 서로 마주 보고 응답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사유의 의무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여성 철학자,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 totalitarianism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그녀의 평생의 화두였다고 합니다. 그녀 역시 나치의 피해자입니다. 이번 챕터에서 일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은 대량학살의 전범입니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합니다. 아렌트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순전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 즉 무관심 indifference에 책임을 부과합니다.


맞습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샤르트르 편에서 우리는 그 논리적인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책임은 곧 응답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상부의 명령에 대해서도, 유대인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무관심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에 꼭 필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히만의 무관심이 히틀러의 나치즘이 활개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일본인들이여, 무관심에서 벗어나 책임 있는 자세로 아베 정권에 대응하고, 당신들의 만행에 피해 입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반응하고 귀 기울이세요. 사유는 의무라고 아렌트는 말합니다. 생각하세요. 전체주의의 피해자는 결국 무관심으로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포기한 당신들 개개인이 될 것입니다. 깨어나길 바랍니다. 방관은 동조이며, 그것은 범죄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

정호, [이정집]


이번 챕터의 제목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하면서 첫 장을 읽어나갔습니다. 메를로퐁티는 [휴머니즘과 폭력]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순진무구함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참 우울한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존재하려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헤치면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폭력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정호는 [황제내경]이라는 동양의학 서적을 읽다가 인(仁)의 개념을 깨닫게 됩니다. 마비된 다리는 내 몸에 붙어 있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더 이상 다리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지만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면 타자도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공감을 이야기합니다. 공감할 수 있는 타자에 대한 범위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고통을 공감하는 사람이 바로 성인 聖人이라고 말합니다.


정호의 선배 유학자인 주돈이는 창 앞의 잡초를 뽑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로 잡초의 뜻이 "내 뜻과 같다"라고 말합니다. 난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얼마 전 산책길에서 느꼈습니다. 한창 숲이 무성해진 공원을 시에서 정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녁때 공원길을 산책하는데 나는 피비린내를 느꼈습니다. 제초기에 잘려나간 풀의 시체더미가 보였고, 이것은 분명 풀 향기와는 달랐습니다. 풀에서 나는 피비린내였습니다. 나는 채식주의자도 아닙니다.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비폭력의 순진무구함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육식도 채식도 모두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폭력을 선택하자는 메를로퐁티의 말에 공감합니다. 나의 생명을 유지 위해서 매일 같이 남을 헤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음식을 함부로 대하지 말자! 낭비하지 말자! 취미로 생명을 헤치는 스포츠는 피하자! 늘 감사하자 등의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동물원에 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푸른 골프장을 유지하기 위해 제초제를 뿌리는 게 싫습니다. 낚싯바늘을 아가미에 걸고 월척을 자랑하는 모습은 보기 힘듭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엄합니다. 생태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가능한 최소한의 폭력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잔인한가 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더러운 피의 자손들이니까요.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들이니까요.





아우라 상실의 시대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48명의 선각자 중에 벤야민도 역시 이름이 올랐군요. 사진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철학자이긴 합니다. 우리가 종종 들어보기도 했고, 사용하기도 하는 '아우라'라는 말의 개념을 만들어 낸 사람입니다. 기술 발전으로 예술품 복제가 쉬워졌습니다. 사진은 처음부터 복제라고 할 것도 없이 원본이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사본과 원본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디지털 사진의 원본은 사본과 어떠한 차이가 있나요? 로우RAW파일이 원본이고 제이피지JPEG파일은 사본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RAW 파일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파일이고 어떤 식으로든 이미지 파일로 변형된 형태가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최초의 원본입니다.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모호해진 시대입니다. 그것이 디지털입니다. 그래서 원본의 기준마저도 각자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나마 필름으로 사진을 촬영한다면 최초 저작자의 손때 묻은 필름이라도 가지고 있으니 아우라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RAW 파일이 완성된 작품이 아니듯이, 암실에서 인화된 사진 역시 원본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림과는 다르게 동일한 사진을 계속해서 재생산해낼 수 있습니다. 원본과 사본의 구분이 없습니다. 뽑아내는 사진마다 물리적으로 100% 차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에디션을 붙일 만큼의 차이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첫 인화가 원본인가요? 두 번째 인화가 원본일까요? 벤야민은 그래서 기술의 발전으로 원본이 상실했다고 말하고,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라는 비운의 여류 사진작가 있습니다. 존 말루프라는 사람에 의해서 발굴된 작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과 인화가 되지 않은 채 남겨진 수많은 필름이 있습니다. 비비안 마이어는 자신도 보지 못한 사진을 우리는 존 말루프를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존 말루프에 의해서 그녀의 사진집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진의 소유자 역시 존 말루프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진집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구매해서 소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원작가의 눈으로, 원작자의 손으로, 직접 현상과 인화가 된 사진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진집에 포함된 사진을 선택한 것도 그녀가 아닙니다. 심지어 그녀는 사진집에 몇몇 사진들을 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순서도 바꾸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론 디지털로 변형된(스캔해서) 이미지를 생산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진집의 형식으로 선보이는 것을 거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원작자의 의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 사진집에는 그녀의 손때가 묻어있지 않습니다. 촬영할 때 바라보았던 그녀의 시선만을 사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사진은 촬영할 때 원작자가 생각한 세상1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세상은 우리가 인화된 사진을 통해서 바라본 세상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원작가가 직접 현상을 하고 인화해서 현실의 세상으로 재현한 이미지는 원작자가 촬영 당시에 바라보았던 세상과는 또 다릅니다. 이렇게 원작가에 의해서 재현된 세상이 또 다른 하나2입니다. 그 세상의 힌트가 사진에 남아있고, 원작자가 바라본 원래의 세상은 아우라로 남습니다. 촬영부터 마지막 액자를 구성하는 단계까지 마무리가 되어야 그나마 아우라는 사라지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라를 상실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집은 소장하지 않았습니다.




여가를 빼앗긴 불행한 삶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대중문화 비평가인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말한 핵심은 이렇습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시각적으로 화려한 가상의 (스펙터클한) 세계는 우리들의 여가시간마저도 현혹합니다. 결국 그것은 노동시간 동안 우리가 만들어놓은 결과물입니다. 자본시장은 우리가 노동해서 만들어놓은 결과물에 우리 스스로 굴복하게 만들어 여가시간마저도 또 다른 노동을 하는데 반납하게 만듭니다. 이것의 해결책은 시각적인 자극에만 현혹되지 말고, '촉각' 즉 직접 몸으로 부딪혀 현실감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생들을 위한 사진 수업을 할 때 '온라인 게임' '사진 찍기'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을 안내하곤 합니다. 디지털 사진은 기 드보르가 말한 것처럼 스펙터클합니다. 온라인 게임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세계입니다. 디지털은 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한순간에 데이터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촉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질 수 없습니다. 가상의 공간에서 혼자서 즐기는 놀이라는 점에서는 온라인 게임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온라인 게임이 훨씬 스펙터클하고 재미있지만 말이죠. 사진의 매력에 빠진다면 온라인 게임 못지않은 흥미를 느끼실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온라인 게임과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추천합니다. 사진은 현실의 세계를 부정한 온라인 게임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선 그곳에 가야 합니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서야 만날 수 있는 사이버 세계가 사진입니다. 그곳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담을 수 있는 나만의 가상세계가 사진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에서 즐기는 온라인 게임과는 다릅니다. 사진은 자연과 내가 함께 협업을 통해서 나만의 가상세계를 창조합니다. 그 세상 속에서 나는 자유롭습니다. 자율 의지로 행한 것만이 윤리적 책임이 따른다고 했던 칸트를 떠올려 보면 사진은 나만의 세상을 내가 나의 의지대로 창조할 수 있으니 책임이 뒤따릅니다. 윤리적 책임의식 또한 사진 활동의 기반에 있습니다.





사랑, 그 험난한 길

묵자, [묵자]


나라가 심히 뒤숭숭합니다.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삶을 곤고히 하기 위해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초들은, 자율의지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역사는 반복되듯이 당파 싸움은 여전하고, 매일 같이 쏟아지는 뉴스는 그 진위를 알 수 없고, 다툼의 연속입니다. 안에서 다투고 밖에서도 다툽니다. 밖에서 다툼을 하는 이유가 안에서의 승리를 위한 개인적인 욕망으로 이용하고, 내부에서는 자기들의 목소리를 키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왜 싸우려고 하는 것일까요?


앞선 챕터의 바티유가 말한 '불유쾌한 파멸'이 떠오릅니다. 에너지가 넘치면 반드시 소모되어야 한다고 바티유는 말했습니다. 그 방식이 폭력적일 때 그는 '불유쾌한 파멸'이라고 했습니다. 쓰고 남은 것은 베풀면 됩니다. 증여하면 됩니다. 꼭 소모해야 되는 잉여가 발생하면 좋은 곳에 쓰면 됩니다. 바티유는 '바람직한 파멸' 혹은 '유쾌한 파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넘쳐나는 잉여 포탄과 총알을 폭력적으로 소모하는 '불유쾌한 파멸'은 진짜 모두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속을 감춘 유비와는 사뭇 다릅니다. (현덕玄德 ) 내 속을 감추는 것이 덕을 쌓는 일에 사용되길 간절히 바라고 실천하고자 합니다.


타자를 헤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헤침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최소한의 희생을 선택했으면 합니다. 바티유의 '유쾌한 파멸'을 꼭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면에 '사랑'이 있어야 함을 말한 묵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겠습니다. 핏빛 세상으로 물든 춘추전국 시대를 구제하는 원칙으로 '사랑의 길'을 역설합니다. 참으로, '사랑, 그 험난한 길'임에 분명합니다. 사랑으로 다 포용할 수는 없는 걸까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자는 반드시 약자를 핍박할 것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신분이 높은 자는 비천한 자를 경시할 것이고, 약삭빠른 자는 반드시 어리석은 자를 기만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전란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반대하면 무엇으로 그것을 바꾸겠는가? 묵자가 말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하는 원칙으로 그것을 바꾼다." [묵자], (겸애 중) 274p




[철학이 필요한 시간]을 통해서 48명의 선각자들의 이야기를 철학자 강신주을 통해서 이해하며 접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 박람회에서 강신주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각 부스를 돌아다닌 기분입니다. 48명의 사상가들의 온전한 아우라를 느끼기 위해서는 무리에서 벗어나 직접 부스에 앉아서 사상가들과 직접 대면할 때, 즉 온전한 원문을 접할 때, 내가 느낀 나만의 아우라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상가들의 생각을 도슨트를 통해서만 이해하는 수준은 아직은 학습 단계입니다. 원작자와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나만의 아우라를 찾아내고 통찰을 경험한다면 나만의 사상체계를 만들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철학 박람회에 다녀온 기분입니다. 강신주가 섭외하기 힘든 동서양의 인지도 높은 철학자들을 3x3m의 48개 부스에 앉혀놓았습니다. 매우 유익한 박람회였습니다. 맘에 드는 철학자의 부스는 따로 방문해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했습니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저자 강신주

출판사 계절출판사

발매 201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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