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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May 02. 2022

[영화] 러덜리스

Rudderless

소통과 공감


영화를 처음 이어서 봤을 땐 음악이 크게 들어오지 않았어요. 가해자 학생(조쉬)의 죽음과 그의 아버지(쌤) 사이에서 조쉬가 만든 음악이 다리 역할을 하는 정도로만 다가왔어요. 음악을 중심으로 다시 영화를 돌려보았고, ‘소통’1)이란 말이 떠올랐어요. 영화는 학교 내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가해자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음악을 중심으로 보니 ‘소통’이란 키워드가 떠올랐어요. 여기서 소통이라 함은 진정한 의미의 공감을 말해요. 아들이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야 아버지가 듣고 있어요. 영화 초반에 조쉬가 부른 ‘Assole’이란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가사를 보면 소유 possession라는 단어가 나와요. 


Accusation, confession, regrets then possession

기소--> 자백--> 후회--> 그리고 마지막 소유


자신이 행할 일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조쉬는 이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란 걸 알고 있어요. 그렇게 믿고 있어요. Assole이란 노래로 조쉬는 ‘소통’하고 싶어 몸부림치고 있어요. 조쉬는 ‘소통’의 수단으로 노래를 하고 있어요. 들어주는 사람은 있지만, 제대로 공감해주는 사람은 없어요. 음악을 통한 소통은 단순히 가사에 담긴 이야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가사만 읽어도 충분할 테니까 말이죠. 음악에 실린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은 각자 자신만의 공간2)으로 이동하는 거 에요. 조쉬는 조쉬 자신의 공간으로 쌤은 쌤만의 공간으로 말이죠. 한 번도 쌤은 자신의 그 공간을 가본 적이 없어요. 가본 적이 없으니 조쉬가 그 공간에서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거 에요. 조쉬는 여자 친구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거 에요. 그 소리는 그냥 들리지는 않아요. 다른 예술작품도 그렇지만 음악 역시 우리를 그 공간으로 데려다줄 수 있어요. 그 공간의 느낌을 아는 사람끼리의 의식화된 이야기가 바로 소통이에요. 



1)  음악, 미술, 사진 등의 예술작품에서 사용하는 ‘소통’이라는 말의 참뜻을 작품을 만든 창작자가 표현 하고자 하는 바, 창작기법, 혹은 숨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잘 전달해서, 뷰어/청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소통에 대한 부족한 해석이에요. 작품을 매개로한 진정한 소통은 각자의 의식세계 밖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작가가 자신의 의식 너머의 공간을 여행하고 나서 만들어낸 것이 의식적 표상이듯이, 작품을 감상하는 자 역시도 자신의 창조적 공간인 의식 밖의 세상을 탐험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라 할 수 있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공감일 수 있어요. 음악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다는 것과는 다른 말이에요. 작가가 느낀 것처럼, "나도 이 작품을 통해서 뭔가가 느껴졌어요"가 ‘소통’이고 ‘공감’이에요. 그 느낌은 절대 같을 수는 없겠죠. 같다고 착각하는 것뿐이죠.   


            2)  공간 : 여기서 언급한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지 않아요. ‘슬픔’, ‘기쁨’, ‘분노’, ‘전율’과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가상의 공간이에요. 무의식의 세계일 수도 있어요. 언어로 표현되는 의식세계 밖의 공간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들거나 어떤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면, 그 공간을 말하는 거에요.   




영화의 시작과 함께 조쉬는 Assole을 부르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라고 절규하고 있었고, 쌤의 회사 장면이 잠깐 나온 후 다시 조쉬는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나를 봐주지 않는’ 아빠에 대해 부르짖다가 노래는 중단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와서 그 곡 ‘Sing along’은 아빠 쌤에 의해서 완성되는데, 쌤은 처음으로 아들과의 소통을 느끼고 지금 여기에 없지만 이 세상 밖에서 음악을 통해 분명히 재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있어요.


Help me understand the silence.

그 침묵을 이해하도록 도와줘  


너의 침묵을 이해하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아들에게 노래로 전하고 있어요. 그 침묵을 자신의 침묵의 공간에서 느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쌤은 노래하고 있어요. 아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아들의 마음을 더 깊게 헤아리려고 쌤은 애쓰고 있어요. 이 노래의 가사를 보면서 먹먹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영화의 마지막에 쌤은 이 노래를 부르고 마이크 앞에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세상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쌤은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고, 그때 들어주지 못한 아들의 이야기를 지금이라도 듣기 위해 노래할 방법을 찾고 싶어 해요. 혹시라도 그 영적인 공간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함께 불러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맘으로 아들에게 기도하고 있어요. 쌤도 이젠 아들처럼 노래를 통해서 말하고 있어요.




저는 쌤이 단순히 아들 잃은 슬픔을 노래로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이제라도 진짜 아들과 이야기하려고 노래하고 있어요. 그것이 현실 속에선 음악으로 하는 치유 과정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쌤은 그래서 노래하는 게 아니에요. 아들의 맘을 함께 공감해주고, 아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려는거에요. 결국 쌤도 이젠 아들처럼 노래로 자신을 이야기해요. 




고등학교 때 그렇게 음악이 하고 싶었어요. 존재의 상실을 경험한 때이기도 하죠. 이곳에 내가 있지만 내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학교에서의 하루 일과는 웅성이는 소음이었고, 선생님의 목소리는 또렷하지 않았죠. 위로를 받기 위해 음악을 듣기도 했지만,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그 시기를 버티는 저의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그때 들었던 음악은 어느 때 들었던 음악보다 생생하게 몸으로 전해와요. 대학에 와서는 나만의 음악활동이 ‘시’ 쓰기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보다는 의식세계에서 작동하는 머리가 좀 컸던지, 글로 표현하면서 마음을 치유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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