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은 저에겐 의미 있는 사진인데요. 사진을 시작하게 해 준 사진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이미 시작한 사진에 힘을 실어준 사진입니다. 사진으로 뭔가를 해봐도 되겠다는 마음속 확신을 심어준 사진이죠.
첫 두 롤 / 첫 과제물 사진이에요. 사진을 해본 적이 없는 저에겐 암실작업은 두려운 작업이었죠. 학교에선 간단한 안내만 있었고, 그것도 영어로 말하니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모든 용어는 낯설고,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릴에 옮겨야 해서 깜깜한 좁은 방에 들어갔는데, 이럴 수가 정말 코앞도 안 보이고 제 손도 보이질 않았어요.ㅡ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도 배운 대로 감각에 의지해서 필름을 릴에 옮겨 감기 시작했어요. 다 감은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죠. 다시 풀었다가 되감기를 몇 번 반복했어요ㅡ 식은땀이 났어요. 밖에선 다른 외국인 학생이 문을 두드리면서 왜 안 나오냐고 재촉했어요. 불안함에 다시 감았는데 뭔가 제대로 감기진 않은 것 같았지만 대충 뚜껑을 닫고 나왔어요.ㅠㅠ 망했다 싶었죠. 필름상태가 많이 안 좋을 것 같았죠. 현상은 제대로 될지조차 걱정이었어요. 사진이 나오긴 할까? ㅠ
현상한 필름에 사진이 보이긴 했어요. 휴~~ 신기하게도.... WETPRINTING으로 사진이 나타나는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었죠ㅡ 이 맛으로 사진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었어요. 잘된 사진이 건 아니 건간에 종이에 이미지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저는 대만족이었어요. 사진은 거칠고 먼지와 스크래치가 많았지만 숙제를 제시간에 제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었죠!
그런데.. 사진에서 뭔가 문제를 지적받을 줄 알고 긴장하면서 수업에 참석했는데, 첫 크리틱 시간에 모든 학우들이 뽑은 베스트사진으로 선정되었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요?! 망처 버린 현상인데 말이죠. 로버트 교수님은 본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동의까지 해주시니, 이 사진이 뭐가 좋은 걸까? 사진을 전혀 몰랐던 나로선 기분은 좋았지만, 무엇 때문에 좋은 평을 받았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죠.
'아~ 내가 사진을 해봐도 되긴 하겠구나'라는 맘속의 생각과 함께 비즈니스 스쿨에서 사진학교로 전학을 온 것에 대한 불안함이 조금은 누그러졌던 기억이 납니다. 시작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사진을 공부하면 더 훌륭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꿈을 꾸었었죠. 하지만 프로 사진가로 활동한 지 몇 해 전에 이미 10년을 훌쩍 넘겨버린 지금, 난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로 돌아가는 길을 찾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