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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 Aug 01. 2018

‘채울 수 있는 빈 그릇’

MUJI(無印良品) 브랜드텔링

지극히 합리적인 공정을 통해 생산된 상품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를테면 ‘텅 빈 그릇’과 같은 존재로, 단순하면서도 여백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그 속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무지 웹사이트 ‘What is MUJI?’ 중에서 


1915년 러시아의 전시관 한편에 ‘검은 사각형’ 이란 제목의 유화가 전시되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그림은 캔버스 가운데 검은 사각형 하나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는 유화였죠. 화가는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Kazimir Malevich, 1915, Black Suprematic Square , 79.5 x 79.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는 격변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니콜라이 2세의 무능함에 치를 떨던 사람들은 구태를 벗어나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있었죠. 러시아의 전위파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주제를 없애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無’ 그렸습니다. 어쩌면 황족이나 귀족들이 향유하는 화려함으로 복잡한 것들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중심에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있었고 그의 ‘검은 사각형’ 이란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작품들 앞에 선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말하는 주제가 이해되지 않으면 자신 안에 잠들어있던 기억을 끄집어내 작품과 함께 이야기하기 마련이죠. 아무것도 없기에 자신 만의 의미가 부여되는 겁니다. 작품은 보는 사람과 암묵적 상호작용으로 그들만의 이야기가 채워지죠. 

후대에 이 그림을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효시라 칭합니다.  

미니멀리즘은 ‘최소한의’를 뜻하는 minimal에 ism(주의, 주장)이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미니멀리즘은 어원대로 장식적인 기교를 최소화하고 오브제(Object)의 본질만을 표현하면 진정한 심미(審美)가 된다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술에서 시작한 사조는 당대에 만들어지는 물건에 영향을 끼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게 될 것을 크리에이터들의 상상에 의해 먼저 드러나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능으로 경쟁하던 제품들은 기능에 기능이 얹어져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복잡함을 더해가고, 디자인으로 경쟁하던 제품들은 경쟁자 제품의 모습을 능가하는 형태를 위해 화려함을 더해가고 있을 때 미니멀리즘을 입은 제품들은 최소한의 기능과 단순한 모습으로 등장해 차별화된 모습을 선보이곤 했죠.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디자이너들의 외침은 ‘No Design’. 디자인 없이 물건 자체의 쓰임을 주목하는 것. 

그렇다고 그들이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결함 속에 심미적인 것을 함축시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죠.  

환경의 문제가 대두되고 복잡한 정보로 유통되기 시작한 1980년대 미니멀리즘의 바람은 세계적인 화두가 되어가고 있었고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움직임이 일본의 유통시장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제품들에 제조 공정을 간단하게 줄이고 환경에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간결한 제품 콘셉트가 대두되기 시작한 겁니다. 거품을 빼자는 거죠. 

이런 분위기 속에 일본에선 브랜드도 없앤 브랜드가 등장했습니다.  

이름하여 

무지(Muji, 無印良品 ( むじるしりょうひん,무지루시료힌))

 

1980년 세이부 계열의 대형 슈퍼마켓 ‘세이유’의 PB(Private Brand) 브랜드로 출발한 무지는 무인양품의 발음에서 앞에 두 음절만 따서 소리 나는 대로 적어 영문으로 브랜드 명을 만들었습니다. 무인양품의 ‘무인’의 발음은 ‘무지루시’로 ‘무[Mu]’와 ‘인[Shirushi]’이 합쳐져야 무지루시[Mujirushi]라는 발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지’라는 브랜드 명의 의미의 최소 단위는 ‘무인(無印)’입니다.  

무인(無印)은 印이 없다는 의미죠. 인(印)은 도장이란 의미로 작품이나 물건 등에 만든 사람의 이름을 찍는 도장을 의미합니다. ‘무인’은 말 그대로 ‘브랜드가 없다 혹은 브랜드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브랜드가 없는 좋은 물건’이란 뜻을 가진 무인양품(無印良品) 바로 MUJI입니다. 

무지의 디자인 철학은 ‘No Design’. 생산 과정은 철저하게 간소화하여 브랜드 로고 등의 각인조차도 없애 ‘이유가 있어서 싸다’라는 메시지를 광고에 사용하기도 했죠. 디자인도 없애고 브랜드도 없앴기에 모든 비용을 절약하겠다는 신념을 내비친 겁니다.  

생활환경에 주목하는 소비자와 독특한 아이디어에 민감한 소비자들의 지지를 얻어 1983년 Muji는 슈퍼마켓을 벗어나 아오야마에 1호 매장에서 날개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간소화라는 조용한 속삭임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생각이 바뀌면 결국 운명이 바뀐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정신은 브랜드의 모든 것을 바꿉니다. 훌륭한 브랜드의 정신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모든 터치 포인트(Touch Point)를 바꾸어 놓기 때문이죠. 터치 포인트는 제품에 대한 사용 경험부터 입소문, 광고, 웹사이트, 매장 등 브랜드가 고객과 만나 상호작용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이 모든 것이 브랜드 정신에 의해 효율적으로 통제될수록 효과적인 브랜드텔링이 이루어지고 우수한 브랜드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됩니다. 각 터치 포인트까지 전달되지 않는 브랜드 정신과 브랜드의 메시지는 말뿐인 허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무지는 제조 과정부터 판매단계까지 브랜드의 정신을 적용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우선 디자인에 대해선 ‘No Design’을 지향한다 말합니다. 이 말의 진의는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1580 년 중반에 신조어로 등장한 ‘design’은 ‘고안하다, 선택하다, 지정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미만으로 단순하게 해석해도 무지는 쓸데없는 부분을 생략해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고안을 선택하고 지정했다는 의미일 겁니다.    

후에 합류한 무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하라 켄야(原研哉)는 ‘무인 양품의 사상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오히려 수준 높은 디자인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없애기 위해 더욱 정교하고 정제된 디자인이 필요하단 의미겠죠. 

무지의 간소화 정신으로 디자인된 제품은 독특한 시각적 정체성을 만들어 냅니다.  

제품화 간소화 과정으로 표백하지 않은 아이보리 빛깔의 종이 소재 사용과 간결한 포장의 형태로 ‘신선한 느낌의 순수한 제품’이라는 당시로는 독특한 시각적 심상을 심어주었죠. 자연환경을 아끼는 공정과정의 간소화는 생활에 의해 환경을 소비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는 소비자에게 지지를 얻어냈고 표백하지 않은 빛깔의 소재라는 독특한 시각적 심상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갈망했던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으며 무지만의 시각적 상징이 되었습니다.  

고객의 인지를 넘어서 지지를 얻어내는 것은 정체성이 됩니다. 지지라는 것은 동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죠.  

(좌)無印良品風行全球的秘訣 책 (우) 무지제품

 

무지의 간소화에 의한 시각적 정체성의 탄생은 경영자와 크리에이터의 놀라운 협업 덕분입니다. 무지의 경영자 쓰기 세이지의 간소화에 대한 의지와 디자이너 타나카 잇고의 간소화된 미의식이 같은 비전을 향해 동등하게 협력해 나아갔기 때문이죠. 최소한의 표현에 대한 미의식은 미니멀리즘과 트렌드를 같이 하며 무지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신념이 만든 스타일 

브랜드 명에서 무지는 브랜드가 아니라 말을 먼저 꺼냅니다.  

‘MUJI, 無印良品’는 브랜드가 정말 없는 것일까요? 

‘브랜드의 이름’이란 글에서 무형자산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브랜드 명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브랜드가 이름을 정하고 브랜딩을 하면 브랜드와 접하는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신뢰, 존경, 사랑’ 등의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이 쌓여갑니다.  

무지도 이 부분과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웹사이트의 ‘What is MUJI?’의 설명에서 무지는 ‘텅 빈 그릇’과 같은 존재이고 비어있는 그곳에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간직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라 켄야의 저서 ‘디자인의 디자인’에서 나온 삽화는 이 설명을 뒷받침하고 있죠.  

무지가 말하는 ‘비움’

무지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 채운 그릇을 일방적으로 주기보다는 애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이 그릇에 채우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를 위해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 있는 브랜드 명을 ‘브랜드가 없다’라는 말로 생략하고 싶어 한 거죠.  

무형자산가치를 무지(MUJI, 無印良品)라는 브랜드명과 제품 안에 담고 싶어 하는 브랜드인 겁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함께 하는 사람만큼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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