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근대화를 이끈 남자들의 수다

영국 England |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한 문명

by 비오

1650년 유럽최초의 카페가 옥스퍼드에 문을 연다. 이 후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1714년에 절정을 이루어 8,000여개까지 생기게되었다. 그 사이에 커피하우스라는 장소에선 사설 신문사, 사설 우체국, 주식거래소 등 다양한 근대화 기구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영국은 커피하우스에 모여진 정보를 통해 세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나는 역사적 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으로써 모든 남성이 정보를 얻고 베우는 장소가 된다.


So great a Universitie I think there ne’er was any In which you may a scholar be For spending of a Penny
1페니를 써서 학자가 될 수 있는 위대한 곳이 또 어디있겠는가.

News from the Coffee House, a broadside of 1677



하지만 이 후 여성의 동의를 얻지 못한 커피하우스는 급속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어 1793년에는 551곳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영국에서의 커피하우스는 근대화의 매개장소로 역할을 다하고 역사의 한 켠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런던 최초의 커피하우스 파스카 로제, 시민사회에게 고하다.

레반토 상인이었던 다니엘 에드워즈는 그의 시종인 시칠리아 출신의 파스카 로제가 끓여주는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아침 커피에 행복감을 누리고 있던 다니엘 에드워즈는 친구들이 오면 파스카 로제에게 커피를 내오게 하였고, 호기심 많은 친구들에게 커피에 대한 질문 세례를 받기 일수 였다. 알코올로 휘청거리던 사회에 커피는 신이 내려준 음료로 생각되어졌고 심지어는 알코올 중독을 치유하는 음료로써 모든 이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음료라는 것을 안 에드워즈는 파스카 로제를 도와 커피하우스를 오픈한다.


[그림1] 파스카 로제 기념비와 광고


당시 파스카 로제의 광고문구는 그림1 우측에서 보듯이 다음과 같았다.


The vertue of coffee-drink.
커피의 명소.
first publiquely made and sold in England
by Pasqua Rosee.
영국의 파스콰로제가 만들고 판매하는 첫번째 공공의 장소.


당시 영국은 같은 계급간의 교류만 빈번했었지만, 파스카 로제가 만든 커피하우스는 모든 사람이 올 수 있는 공공의 장소라는 이름을 광고문구에 명시함으로써 커피하우스는 계급에 상관없이 즐기는 장소로 시작이 되었다. 그럼으로 해서 이 후 생긴 커피하우스는 이 전통을 따라 만들어지고 커피하우스는 이른바 계급과 상관없이 시민들이 모이는 공공의 장소가 된다.


커피하우스가 근대신문의 모태가 되다.

17세기 영국은 네덜란드와 해상무역으로 경쟁하고 있어 세계 각국의 정보가 절실히 필요했다. 영국 정부도 이에 자각하고 신문을 만들긴 했지만 당시 해상무역 등의 무역 종사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지난 정보가 아니라 갓들어 온 신선한 정보가 필요했던 터라 사람들은 이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하고 있었다.

알코올 없이 갈증을 채우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커피라는 음료는 커피하우스를 통해 이런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각지에서 활약하던 상인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최신의 정보를 공유하였고, 이를 이용하기로 맘먹은 Richard Steele(1672~1729)은 커피하우스에서 사람들이 주고 받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아 1주일에 한번 소식지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내용은 이렇다. 각지의 커피하우스에 오는 손님들은 비슷한 정보를 양산해낸다. 그래서, 각지 커피하우스 마다 독특한 정보를 섹션화하고 거기에 ‘통신원 데스크’를 두어 사람들의 정보를 모아 중앙으로 보내면, 스틸은 이를 모아 주간지 형태로 발행하는 방식으로 이 신문을 이어갔다.

이는 근대 신문의 전형이 되었다. 섹션이라든가 통신원이라든가 하는 말들은 근대 신문을 만드는 모태가 되었다.

그 뿐 만이 아니라 문학사 적으로도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당시 문학 작가들은 작품속 실제 대화에 대한 내용은 등한시했는데 이 신문은 ‘통신원’에게 대화체로 써주길 권고하여 내용이 마치 옆 사람과 대화하듯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구어체 표현이 발전하였고 영국 문학사가 헤럴드 루스는 문학적 내용을 구어체, 세련된 문체로 풀어내는 방법을 배운 곳이 바로 커피하우스였다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발행되었던 신문은 후에 Tatler라는 최초의 근대잡지가 되었고 민주주의 핵심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런던의 로이즈 커피하우스에서도 신문이 발행이 되었는데 런던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신문 Lloyd’s News가 바로 그것이다.


[그림2] 태틀러 창립자, 이전,현재의 태틀러



[그림3] 근대 신문의 원형이 된 테틀러

One Penny 우편제도

영국은 1678년에 국가 우편제도를 만들었다. 그 후 한동안 우편제도는 신뢰를 잃었다. 배달이 될지 안될지 모르는 우편을 보내야 하는 것이니 당시 사람들의 국가 우편제도의 신뢰는 바닥이었다. 1680년 William Dockwra와 Rober Murray는 1페니 우편제도를 만들었다. 개인이 만든 사설 우편서비스 이다. 로버트 머레이는 우편의 거점으로 커피하우스를 선택했다. 꽤 많은 커피하우스가 생기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거점별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림4] 1680~1682년까지 쓰였던 포스트 스탬프


방식은 우편제도를 시행하는 커피하우스에 걸려있는 자루에 보내고 싶은 주소를 적어넣은 편지나 배달물을 넣어놓으면 편지가 어느 정도 모였을 때 배달하는 형태였다. 이 제도를 통해 각 지역으로 전송된 것은 편지 뿐만이 아니었다. 커피하우스의 신문이나 소식지도 전달되는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해외우편도 이와 비슷하게 세계 각지의 커피하우스를 거점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이 우편제도가 사람들에게 좋은 제도로 인식되어갈 1683년 영국 우정성도 이 방식을 도입하고 거점 별로 우체국을 마련하는 한편 특정 커피하우스를 지정해서 시행했다.

사람들의 소식은 커피와 함께 각지의 커피하우스에 전달되어 서로의 소식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우정성은 이후 1799년 해외우편에서 커피하우스를 배제하고 독자적인 특정 우체국만을 제도에 편입시켰고, 국내 우편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840년에야 배제시킬 수 있을 정도로 커피하우스의 1페니 우편제도는 시민들 속에 단단하게 남아있었다.


돈이 모이는 커피하우스

1690년 영국의 국가 주식거래소 로열 익스체인지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모든 주식거래를 처리하기엔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확장된 공간이 필요했다. 1697년 이런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심하던 차 근처의 조나단 커피하우스와 협약을 맺고 부족한 공간을 커피하우스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증권전문가까지 고용하여 고객의 상담에 응하고 조언을 해주는 편의까지 제공하는 곳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타워거리에서는 선원과 여행자를 상대로 커피하우스를 운영하던 에드워드 로이즈는 1688년 롬바르드로 커피하우스를 옮긴 후 로이드 뉴스를 간행하는 데 이는 보험가입을 희망하는 선박의 리스트를 담고 있었고 로이드는 현재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가가 되는 기반을 이 때 마련하게 되었다.


[그림5] 로얄 익스체인지 안의 Lloyd’s 커피하우스, 거래실


주식과 보험이라는 금융제품까지 커피하우스에서 시작하게 된 것을 보면 당시 커피하우스에 모여든 남성들의 수다로 얻어지는 최신의 정보가 영국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쳤던 증거이다.


효능으로 종교제의에 영향을 미쳐 민초들의 삶에 파고들었던 커피가 영국에 와서는 커피하우스라는 공간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평등하고 자유롭게 바꾸는 장소로 거듭났을 정도지만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1714년 8,000개를 정점으로 내리막을 걷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생업에 종사해서 가정경제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남성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수다를 떨기만 하는 것으로 인식한 여성들의 의견에 의해서이다. 영국 여성들은 이에 강력한 반기를 들고 남성들이 커피하우스에서 각자의 자리에 돌아가길 촉구했고 그 녀들에 의해 새로이 개발된 여성들의 수다장소인 홍차파는 티카페가 성업을 이루면서 영국은 이른바 홍차의 나라가 되어간다.

또 다른 이유는 특정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든 커피하우스는 관련없는 사람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클럽형태로 변환되어 가거나 회사의 형태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점차 음료 중심의 커피하우스에서 음식과 같이 커피를 마시는 식사 위주의 클럽으로 바뀌었고 18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런 클럽의 수가 이전의 커피하우스 수 만큼 늘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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