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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 Sep 24. 2017

생장 피에 드 포르

세례자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통로의 발치

It is a privilege
to be called to the Camino
까미노라 불리는 특권 


이베리아(Iberia)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베로(Ibero)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있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와 에브로(Ebro) 강가에서 고대 그리스의 식민 정착촌을 만들며 살았다. 말 그대로 이베로는 ‘에브로 강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다.

지브롤터라는 해협을 건너와 살기 좋은 에브로 강도 지나치고 북으로 가던 사람들의 순조로운 이동을 가로막았던 것은 피레네 산맥(Pyrenees)일 것이다. 당시 피레네 산맥은 1400m 여 높이의 고산인 데다 길하나 없이 태초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 일터다. 장애물은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지 불가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중 몇몇은 어려움을 딛고 높은 피레네를 넘었을 것이다. 불굴에 의지를 가진 그들에 의해 피레네 산맥의 길이 만들어졌으리라. 

피레네가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말해주는 듯한 마을 하나가 있다. 프랑스 쪽에서 시작하는 피레네의 발치(the foot of a mountain, 산기슭)에 작은 마을 하나가 있었다. 11세기 기록으로 보면 Ugange라는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이름이 흥미롭게도 아프리카에서 쓰인 줄루어(Zulu language)로 ‘벽’이란 의미이다. 피렌체 산맥을 ‘벽’으로 느낀 것인가? 그들은 마을 이름을 그렇게 지어 불렀다. 11세기에 이름이 만들어진 이름인지 그 이전에 이미 원주민들의 약속으로 불렀던 이름인지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 하필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는 줄루어로 해석될까 하며 생각하다 다만 추측했을 뿐이다.

이 마을은 12세기에 탄생하는 새로운 중세도시의 씨앗이 된다. Ugange 주변에 그곳과는 명확하게 다른 새로운 중세도시가 들어선다. 농업과 목축뿐만이 아니라 상업도 이루어지고 새로운 물건을 만들기도 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새로운 도시였다. 

이 도시는 침략한 무어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유럽 각국에서 온 가톨릭 사람들이 이베리아 반도로 가기 위한 길의 시작, 피레네 산맥 비탈을 시작하는 산기슭(the foot of a mountain)에 만들어진 길의 입구, 세례자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안식처였다.  

Saint Jean Pied de Port
세례자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피레네) 언덕의 발치, 안식처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고대부터 살았던 사람들인지 피레네 산맥 북쪽에서 온 이방인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생장 피에 드 포르가 속했던 나바라(Navarre)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은 바스크족(Vascones)이었다. 기원전 74년 로마제국에게 정복당했을 때 이 지역은 바스코니아(Vasconia)라 불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602년 프랑크 왕국에 의해 지배되며 바스크 공국이 되었다. 하지만 바스크인들은 이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토착 민족이라는 자부심과 보수적인 성향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른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824년 프랑크 왕국에 대항해 팜플로나(Pamplona)와 주변의 하부 나바라(Baja Navarre)를 중심으로 뭉쳐 반란을 일으키고 팜플로나 왕국이 탄생한다. 팜플로나 왕국은 점차 영역을 확장해 905년 산초 가르세스 1세(Sancho Garcés I, 905~925))가 즉위하며 나바라 왕국(Reino de Navarra(스), Nafarroako Erresuma(바))이란 국호를 갖게 된다.  

1035년 산초 3세가 암살당한 후 장자 가르시아 산체스 3세(García Sánchez III, ?~1054)는 북부 대부분이던 나바라 왕국 중 현재의 나바라와 바스크, 하부 나바라 지역(Baja Navarre)만을 물려받았다. 

1150년 재위한 산초 6세(Sancho Garcés VI)는 Ugange 마을 근처 멘디귀렌(Mendiguren) 언덕 꼭대기에 성체를 만들고 그 안에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도시를 만들고 세례자 요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1279년 순례자를 위한 인증 도장(sello, 쎄요)에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 역사적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다. 


1279년 생장피드포르 순례자를 위한 인증도장

북에서 침투하는 적국의 위험을 막을 진정한 벽이었던 생장 피에 드 포르는 안전했던 만큼 나바라 왕국의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고 북쪽 이방인 상인들과 공국의 상인을 연결하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문이 되기도 했다. 

생장 피에 드 포르는 레콘키스타 기간 중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걷는 사람들이 반도 북쪽의 문물과 소식을 가지고 들어와 퍼뜨리고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기 전 길을 걷는 데 필요한 것들을 상인들에게 사거나 장인들에게 만들기를 부탁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는 곳이 되어 갔다. 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늘어나고 길이 정비되는 등 까미노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시로 점점 영글어갔다.  

1211년 이슬람 알-무화히드(al-Muwahhidun) 왕조의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해왔지만 나바라,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연합군을 맺어 싸웠다. 수호성인 야고보를 중심으로 뭉쳤지만 그들의 패배는 계속되었다. 1212년 역사적인 전투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Las Navas de Tolosa)에서 벌어졌다. 나바라 왕국의 강인왕 산초 7세(Sancho el Fuerte)가 연합 기독교군의 선두에 서서 무화히드 왕조 군사의 방어선을 모두 뚫고 칼리프의 막사로 곧장 진격했다. 에미르 미라마몰린(Emir Miramamolín)의 막사를 지키던 호위군사들은 서로의 몸을 황금 사슬로 묶어 에미르를 죽음으로 보호했다. 산초 7세는 이들을 물리치고 황금 사슬을 끊어 에미르를 굴복시킨다. 산초 7세는 이 황금 사슬을 전리품으로 가져왔고 승리를 기리기 위해 방패에 황금 사슬이 그려진 문양으로 나바라 왕국 문장(Escudo de Navarre)이 탄생한다.

나바레 왕국 문장들

전투에서 위용을 떨치며 강인하기로 소문난 산초 7세에겐 안타깝게도 왕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없었다. 1234년 산초 7세의 여동생 블랑카(Blanca de Navarra)와 프랑스 상파뉴 백작 티보 3세(Thibaut III de Champagne)의 아들 테오발도 1세(Teobaldo I)가 그의 뒤를 이으며 나바라 왕국은 스페인계가 아닌 프랑스 왕가의 일원이 된다. 이후로 여러 번 스페인계 왕조와 프랑스 왕조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나바라 왕국은 레콘키스타 활동에서 프랑스계라는 이유로 제외되어 이베리아 반도 국가 연합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1512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왕국(Aragón y V de Castilla) 페르난도 2세(Fernando II)는 피레네 북쪽 하부 나바라 지역을 제외한 나바라 지역을 무력으로 합병하여 1516년 스페인의 통일 왕국에 속했지만 하부 나바라 지역은 후안 3세(Juan III)이자 프랑스 알브레(Albret) 백작 장 2세(Jean II)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프랑스령이었다. 루이 13세(Louis XIII, 1610~1643)에 의해 1620년 10월 이곳은 완전히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이때 이후로 까미노는 유일한 프랑스 도시에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바라의 Charles II 는 생장 피에 드 포르를 ‘나바라 왕국을 여는 열쇠’라 말했다 한다. 열쇠를 소유한 사람은 피레네를 무사히 열고 나바라로 갈 수 있겠지만 열쇠가 없는 사람은 황금 사슬로 꽁꽁 여민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까미노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이곳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까미노를 여는 열쇠를 만드는 일이다.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순례자 협회 사무실에 가서 끄레덴시알(Credencial del Peregrino 순례자용 여권)이라고 하는 열쇠를 받아야 한다. 이 열쇠는 생장 피에 드 포르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동안 순례자임을 증거 하는 것이고 쉬어가는 도시마다 알베르게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까미노를 가는 내내 열쇠를 가진 순례자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따뜻함이요 안전함이다.


순례자용 여권(Credencial del Peregrino)

파리의 몽파르나스역(Gare de Montparnasse)에서 때제베(TGV)를 타고 바욘(Bayonne)을 도착한 나는 늦은 저녁에 생장 피에 드 포르로 향하는 국선을 탔다. 도착한 시간 생장 피에 드 포르는 짙은 어둠이 차있었다. 40일간을 타지에 살아야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나에게 늦은 저녁의 생장 피에 드 포르는 자체가 두려움이자 쓸쓸함이었다. 도착시간을 잘 맞춰 오전이나 이른 낮에 도착했더라면 순례자용 여권을 받아 생장 피에드포르 알베르게에 묵을 수 있었을 텐데 하며 후회했었다. 

다음 날 새소리 가득한 아침 펼쳐진 피레네 산맥의 산기슭 풍경은 나의 두려움은 가져갔지만 혼자라는 쓸쓸함을 더 얹어주었다. 

사무실에서 순례자용 여권과 가리비 조개를 받고 생장 피에 드 포르의 첫 번째 도장(sello, 쎄요)을 찍었다. 

사무실에서 나와 작은 마을을 쓸쓸한 마음으로 다녔더랬다. 허함을 채우기 위해 맛있는 것을 더 찾아 먹으려 했던 거 같다. 내일부터 어쩌면 끼니도 잘 못 챙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생장 피에드포르 순례자 사무실과 사무실에서 순례자 등록시 받는 순례자용 여권과 가리비 조개


다음 날 새벽어둠을 짊어지고 앞날의 일을 예측하지 못한 채 출발해야 했다. 사방으로 펼쳐진 피레네 산맥의 풍경을 배경으로 나폴레옹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할 당시 이용한 나폴레옹 루트를 따라 전설이 꿈틀거리는 길을 걸어 내가 도착할 곳은 바로 산초 7세의 전리품, 나바라 왕국의 황금 사슬이 있는 곳이었다.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  


생장피드포르 문장

Saint Jean Pied de Port Coat of Arms

좌측 상단 

- 요새화 되었던 상징인 성

우측

- 성을 세례 하거나 축복하는 듯한 모습의 세례자 요한 (이 도시의 세례명)

 세례자 요한이 했던 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좌측 하단

 산초 7세의 전리품 황금 사슬 - 나바라 왕국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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