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오 Oct 21. 2017

수비리

다리 옆 마을

On the Camino…
there are many lessons to be learned
까미노엔 … 배울 만한 교훈들이 많다.



나바라 지역을 걸으며 꽤 오래전 기억들이 까미노 곳곳에 묻어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기억은 이베리아 반도에 제일 먼저 살기 시작한 바스크인(basques)들이 살고 있는 나바라였기에 가능했구나 하는 생각과 이어진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가는 길도 그랬다. 마을의 모습은 현대적인 모습이었지만 곳곳에 놓인 삶의 흔적들은 꽤 오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이유에 대해 지금에야 알았으니 그때 그 길 위의 내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들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샘터와 공동묘지


옛 모습의 기억은 몇 백 년의 간극을 두고 만들어진 길, 집, 마을 곳곳에서 조화롭게 각 시대의 특징적인 모습을 뽐낸다.. 

제일 먼저 도착한 마을, 론세스바예스와 같은 지명이었던 부르게떼(Burguete)의 성 니콜라스 성당 (Iglesia de San Nicolás de Bari)은 16세기의 모습을 간직한 반면 그다음 마을 에스삐날(Espinal)의 산 바르똘로메 성당 (Iglesia de San Bartolomé)은 1961년에 건축되어 현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모습은 달라도 그 시간을 오롯이 쌓아놓고 새겨 넣은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벽채를 손으로 쓰다듬으면 그때 그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그 눈물은 감동을 받아서 혹은 내 감정에 취해서 나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 벽은 맨 손으로 벽돌을 다듬은 그들의 손처럼 우직했고 거칠었다. 몇 백 년의 시간을 건너 그들의 손을 쓰다듬은 듯한 느낌과 함께 눈물이 뚝 떨어진 것이다.


(좌) 부르게떼 바리의 성 니콜라스 성당 (우) 에스삐날 산 바르똘로메 성당


길을 걸으며 오래전 시간을 되돌아보는 여정의 백미는 수비리(Zubiri)의 라 라비아 다리 (El Puente de La Rabia)였다. 


11세기 그 마을 주민들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아르가강(Rio Arga)의 다리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리 만들기를 시작할 때 계획했던 기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다리 건설은 난항을 거듭했다. 다리를 만드는 것을 누군가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 일이 터져 건설이 지연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중앙 기둥을 세울 튼실하면서도 오래 버틸 수 있는 암석을 찾는 것이었다. 어느 날 주민 모두에게 호출이 내려졌다. 산에서 암석을 찾는 사람들이 적절한 암석을 찾았으니 모두 와서 도우라는 말이었다. 

정말 좋은 암석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말처럼 주민 모두가 힘을 합쳐 파내야만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반가운 마음에 모두 달라붙어 암석을 덮고 있는 흙을 걷어냈다. 한참을 파내고 있을 때 젊은 여인에게서 나는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깊이 팔수록 점점 더 강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향기가 퍼지는 곳에서 고운 포에 쌓인 시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혀있는 것을 보니 산타 키테리아 (Santa Quiteria)의 시신이었다. 키테리아 성인은 한번 걸리면 고칠 수 없는 공수병(恐水病 Rabies)의 수호성인이었다. 회의를 통해 우선 성인의 시신을 팜플로나에 있는 나바라 왕국의 대성당으로 모시기로 했다. 시신을 모신 수레를 노새에게 끌게 하고 몇 사람이 함께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 수레가 팜플로나 전 마을 불라다(Burlada)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노새가 더 이상 가질 않고 멈추어 섰다.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달래도 보고 채찍도 써 보았지만 노새는 요지부동이었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신을 들고 갈 만큼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노새가 앞으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뒤를 돌아서자마자 왔던 길을 재촉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을로 돌아온 일행은 노새의 이상한 행동을 말했고 마을 주민들은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며 다리 중앙기둥에 성인의 시신과 함께 있었던 암석을 사용해 고이 모셨다. 

다리 중앙기둥이 완성되자 다리의 건설은 일사천리였다. 다리는 완성되었고 다리에서 병이 나은 사람들에 의해 소문이 번져갔다. 공수병의 수호성인을 모신 다리 중앙기둥을 세 바퀴 돌면 공수병에 걸린 동물과 사람이 낫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다리의 이름 La Rabia를 따서 공수병의 이름도 Rabies가 되었다. 

마을의 주민이 편의를 위해 만들었지만 마을보다 더 유명해진 다리로 그 마을의 이름도 정해졌다.

  

Zubiri
다리 옆   


라 라비아 다리 (El Puente de La Rabia)


다리는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새로 지어져 깨끗하다는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함께 온 사람들과 마을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알베르게의 식당으로 갔다. 식당 밖으로 마을 입구가 보이길래 나가보니 운 좋게도 알베르게 건물 바로 옆에 다리가 있었다. 알베르게 주인이 말하는 것을 언뜻 들으니 아주 오래된 다리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땐 그 정도의 식견으로 다리를 봤다.  그럼에도 내 기억 속에 그 다리는 오래된 삶의 여운을 풍기고 있었다.


수비리는 작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까미노를 걷기 전까지 나에게 스페인은 커다란 대도시 만을 연상시켰다. 수비리를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까미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난 이 작은 마을에 올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내일의 기대감이 있었다. 까미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도시,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던 


팜플로나 
Pamplona


그 도시에서의 하루다. 




수비리 문장

Escudo de Zubiri

자료를 못 찾아 추측하자면

- 세 개의 백합 문장(fleur de lys)으로 보아 중세에 프랑스령이었던 것 같다.

(주민들 중 많은 수가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사람일 수도, 충성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 어쩌면 3개의 백합은 이 마을의 2개의 성당과 1개의 다리의 수호성인일지도 모른다.

   (백합 문장은 성인을 나타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론세스바예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