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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Jan 07. 2021

세 아이의 소원


 초등학생만 되어도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답할 때 순수성을 잃을 수 있다. 듣는 사람이 좋아하거나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을 말한다. 현실성이 가미된다. 적당한 수준에서 답을 고른다.


 다섯 살 이하는 다르다. 불가능하거나 허황된 얘기를 할 수도 있고, 날 것 그대로의 현실적인 소원을 말하기도 한다. 날아다니고 싶다거나, 초콜릿이 먹고 싶다거나. 한마디로 크게 의미를 둘 내용은 아니라는 말이다.


여섯 살과 일곱 살,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경계에 있다. 이렇게 답해도, 저렇게 답해도 이해가 된다.


 아이들과 떨어져 지낼 때인 몇 개월 전, 아내가 세 아이에게 소원을 물었다. 세 살이었던 막내는 별 의미 없는 대답을 했나 보다. 아내도 나도 기억을 못 한다. 소원이란 말의 뜻을 모르니 뭐라고 대답해도 웃겼을 텐데. 아무 대답을 안 해서 기억 못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섯 살이었던 둘째는 태권도 잘하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그날 어린이집에서 태권도를 하고 왔나 보다. 그리고 잘 못했나 보다. 조금만 노력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내일의 소원은 또 다른 것이겠지만.


 일곱 살이었던 첫째는 '아빠가 일 안 해도 돈 잘 벌어 부자 돼서 평생 가족이 같이 사는 게' 소원이란다. 가히 내 소원과 비슷하다. 나이 들어 소원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첫째의 소원을 듣고 보니 아이의 소원이 아니라 내 소원이다. 일곱 살이 할 말인가 싶게 구체적이면서 현실적이다. 자신이 뭘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가족이 함께 사는 게 소원이라는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안쓰럽다.


 첫째는 아빠가 왜 시골에 사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다. 떨어져 살기 시작한 후로 볼 때마다 시골에 가지 말라고 한다.(근데 또 막상 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잘 지낸다고 한다.) 매번 묻는 첫째에게 아내가 아빠는 회사에 출근해야 해서 시골에 가야 한다고 하니, 회사를 경멸한다. 직장에 다녀야 돈을 벌어 음식도 먹고, 옷도 입고 한다고 설명해 줬나 보다. 그러니 소원에 ‘일 안 해도 돈 잘 벌어’라는 조건이 붙었을 것이다.


 그날은 아이들을 보러 올라갔다가 시골로 내려오는 날이었다. 회사 가지 말라고 우는 첫째를 씻기고, 양치시키며 달래고 있는데 아빠 왜 시골 가냐고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친구 00이도 아빠가 집에 있고 00이도 아빠가 집에 있단다.


 우리 아빠만 집에 없다고 원망하길래, 아빠 직장이 시골에 있어서 그렇고, 아빠 직장이 있는 덕분에 돈도 벌어 엄마와 결혼도 하고 우리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첫째가 울다 말아 눈물 가득 고인 눈을 하고 묻는다.


 아빠! 우리 돈 주고 사 왔어?

 웃음이 터졌다. 웃는 나를 보고 ‘엄마 쭈쭈도 돈 주고 사서 넣어놓은 거야?’고 덧붙인다. 일곱 살 아이의 귀여운 상상에 아내와 이야기하며 한참을 웃었다.


 ‘같이 사는’ 소원은 이제 해결이 되었는데, ‘일 안 해도 돈 잘 버는’ 소원은 아직 요원하다. 첫째의 소원을 위해서라도 경제적 자유를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해봐야겠다.




  나의 소원 같은 첫째의 소원을 응원한다.  아마 소원을 이뤘을 때 물으면, 자신이 그런 말을 했었는지 기억도 못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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