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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Feb 19. 2021

내 머릿속에 지우개 아니고 포토샵


 위기 없이 성장한 사람은 없다. 단언적 표현을 조심하는 편이지만, 앞 문장에서는 ‘없다’는 단언적 문구가 적절하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이고, 어느 성공인, 유명인, 행복해 보이는 누군가도 위기를 지나왔거나 지나는 중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에 대부분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돈이 많다고 행복할까?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기업인, 재벌N세의 불행한 소식을 보고 있자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유명해지면? 예쁘고 잘생기면? 친구가 많으면? 어떤 조건과 인생을 살더라도 위기는 공평하게 누구 하나 거르지 않고 찾아온다.      


 크고 작은 위기를 극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거나, 적어도 위기에 굴복하지 않은 결과로써 현재에 이른다. 그런데 힘겹게 이겨낸 위기의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으로 순화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직장인들은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서 좋은 추억으로, 돌아가고 싶은 시절로 그리워한다. 입시, 시험, 통제, 성적으로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텐데, 지나고 나면 대부분 그 시절을 좋은 기억으로 추억한다.  

개인적으로는 사관생도 생활이 쉽지 않았다. 해야 할 것은 많고,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재미있고, 좋았던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임관하고 15년 정도 근무하면서 세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정말 힘들었고, 내가 이 위기를 잘 극복 해 낼 수 있을까 근심이 컸다. 다행히 잘 넘겼던 것 같다. 얼마 전, 지난 위기를 돌이켜보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위기’가 있었다는 건 명확히 기억하는데, 위기의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다. 힘들었다는 생각은 남았지만 ‘무엇’ 때문에 힘들었던 건지 까먹어버렸다. 그땐 그렇게 힘든 일이, 시간이 지나고 이렇게나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허무하기까지 하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영화가 있다. 정우성과 손예진이 주연하여 기억이 사라지는 아내의 스토리로 사람들 꽤나 울린 멜로영화다. 내 머릿속엔 지우개가 아니라 포토샵이 들어있는 것 같다. 지난 기억을 알아서 뽀샵 처리해준다. 좋은 기억은 번짐 효과로 아련하게, 안 좋은 기억은 흐림 처리로 희미하게, 어떤 기억은 잡티제거처럼 부분 보정까지 해준다.


 좋은 기억을 오래 간직하는 게 진화론적으로 이득이기에 내장 소포트웨어처럼 머릿속에 포토샵이 장착된 것일까? 관련된 분야의 전문성이 없어 과학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지난 기억이 순화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여러분의 머릿속에도 포토샵이 내장되어 있을 테다. 내껀 성능이 꽤나 좋은 것 같다. 기억에 시간이라는 꽃가루가 묻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꽃가루가 소북이 쌓여간다.

      



 반기지 않지만, 어김없이 찾아 올 위기를 차분히 헤쳐나가자. 지금의 위기도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꽃가루 흩날리는 들판 위를 여유롭게 거닐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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