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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코치 Apr 21. 2021

꽃이 좋아지면 나이 든거라는 말에 대해

  꽃과 관련해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을 받은 것은 20살 때가 처음이다. 그전까지 꽃은 향기 나고 예쁘다는 정도의 일상성에 지나지 않았고, 자세히 본다거나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20살이 되어 사관학교에 들어와서 꽃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좋은 의미로 제대로 보게 된 것이고, 사실 빨리 피기를 고대하며 관찰하게 되었다.


  진해는 벚꽃으로 유명하다.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도 벚꽃으로 둘러 쌓여있다. 학교 안 도로 주변에는 벚꽃나무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어, 만개하면 장관을 이룬다. 1월 가입교 이후 3월까지 정신없는 신입생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1학년은 핸드폰을 소지할 수도 없었고, 외출도 나가지 못했다. 주말에는 선배들이 따로 불러 평일에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친목의 시간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3월 말 토요일 아침이었다. 날씨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여유 없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위기를 넘기느라 여념이 없던 그때, 2학년 선배가 1학년들을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고 토요일 아침 지구탑광장(생도들이 집합하는 야외 광장)에 모인 우리는 2학년 선배로부터 의외의 말을 들었다. 


‘봄이 왔다’

뭔가 이상하다. 보통 ‘너희들의 잘못은 이러하다’로 시작되는 레퍼토리를 벗어나는 선배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했다. 무슨 꿍꿍이 일까.


‘진해는 벚꽃으로 유명하다. 진해에서 가장 빨리 벚꽃이 피는 곳이 어딘지 아는가?’

왜 저러지 불안하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사관학교다. 이유는 너희들의 뜨거운 열기로 벚꽃을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헐.. 그럼 그렇지. 지금부터 열이 펄펄나게 뛸 거라는 얘기였다. 알고 보니 오래전부터 ‘벚꽃 피운다’는 명목으로 후배들을 굴리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후배들을 굴리기 위해 ‘벚꽃’을 갖다 붙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때부터 벚꽃이 피기를 기원하며 몇 날 며칠 학교 구석구석을 뛰어다녔다.

 

아니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열기로 벚꽃을 피운다는 게 말이 되냐는 말이다.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일부러 숨을 크게 내쉬기도 하고, 벚꽃나무와 가까이 스쳐 지나며 열기를 뿜어댔다. 다 뛰고 들어가는 길에 손안에 벚꽃 망울을 모아 넣고 입김으로 호호 불어도 봤다. 뭐든 기다리면 더 느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매일 꽃이 피기를 바라니 벌겋게 익은 조그마한 망울이 왜 이렇게 안 터지는지. 덕분에 벚꽃이 피는 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망울이 조금씩 커지더니 표면에 하나 둘 선이 생기며 잎의 경계가 차츰 도드라졌다. 그러다 망울이 터지며 벚꽃이 속살을 드러내니 괜히 뿌듯했다. 시간과 계절이 피운 꽃이지만 의미를 불어넣으니 애정이 느껴졌다. 내 온기가 조금은 깃들어 있다는 묘한 애착도 스몄다. 아직 학교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했으면서 사관학교 벚꽃이 가장 빨리 폈다며 동기들과 키득거리며 자부심도 느꼈다.

    

  그즈음 생도생활에서 가장 인상 깊게 기억되는 장면을 마주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식 식사를 위해 식당에 가려면 교회 뒷길 계단을 올라와 교회 앞에 멈춰 서있어야 했다. 12명이 모여 3열*4줄 대열을 갖춰 이동해야 하기에, 먼저 온 사람들은 3열로 자리 잡고 서서 3*4, 12명이 채워지길 기다렸다. 1학년이던 그때, 터벅터벅 힘겨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왔는데 바로 앞에서 12명이 채워져 대열이 출발했고, 나는 새로운 12명을 모으기 위해 제일 앞 줄에 서서 뒷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교회 앞 아름드리 벚꽃나무 대여섯 그루에는 벚꽃이 만개해있었다. 멍하게 서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휙 불더니 눈앞에서 벚꽃이 함박눈처럼 흩날렸다. 수천 송이 벚꽃이 흩날리는 모습에 숨이 턱 막혔다. 나도 모르게 와... 감탄이 흘러나왔다.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12명이 맞춰졌고 뒤에서 ‘앞으로 가’ 라며 전진신호를 보내 벚꽃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순간의 장면이 기억에 새겨져, 벚꽃 피는 계절이 되면 항상 떠오른다.


 요즘 사방에 꽃이 한창이다. 형형색색의 꽃들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노을은 또 어떤가. 바다로 해가 넘어가는 장관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찌릿하고 웅장한 느낌이 든다. 부대 안 나만의 아지트에서 형형색색의 꽃들과 바다로 해가 넘어가는 붉은 노을을 보는 것은,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고백하자면, 원래 브런치 프로필 사진도 직접 찍은 노을 사진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프로필도 아저씨 느낌 나는 노을 사진이더라’는 글귀를 보고, 내 얘기도 아닌데 괜히 찔려 급히 사진을 바꿨다.

  

 꽃이 좋아지면 나이가 든 것이라고들 한다. 노을도 비슷하게 언급된다. 꽃과 노을이 좋아지니 나이가 들어가고 있긴 한가보다. 뭐 어떤가. 모든 생명체는 나면서부터 끝을 향해 달려간다. 어느 순간 이제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원치 않는 끝이 갑자기 들이닥칠 수도 있다. 꽃과 노을을 눈에 담고, 즐기며 기쁨을 느끼고 싶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멋진 풍경을 보여주려 한다. 자연을 벗 삼다 보면 세상만사 고민이 별일 아닌 소소한 일상이 된다. 작은 것에 매몰되거나 마음 쏟지 않고, 그자리에 좋은 기운을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논리적 오류를 슬쩍 밀어넣은, 이분법적 질문을 건넨다.

 

이번 주말에는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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