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아무런 징후없이 찾아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나는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일까. 의사는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아니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갑작스럽게 빠져버린 체중과 일어나 앉기도 힘든 내 모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아내는 수술을 받자고 하지만, 희망이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다. 딸아이는 말이 없다. 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되려 걱정스럽다.
죽음이 문 앞에 서 있다. 언제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다. 사람이 이렇게 무력할 수도 있구나. 얼마나 남았을까? 그동안 뭘 해야하지? 엄한 아내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짜증을 낸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산 사람과 정을 떼려는 것이란 어른들의 말이 생각났다. 이런거구나. 반팔을 입어도 되는 날씨인데 병실은 에어컨을 틀어놓은것마냥 냉랭하다. 무섭기도, 춥기도하다. 차라리 둔감해졌으면 좋겠는데 이쑤시게같은 몰골처럼 신경은 날카롭고, 조그만 자극에도 소스라치듯 경기를 일으킨다.
추하게 죽으면 안될텐데... 생각은 그런데 튀어 나오는 말마다 서리가 끼어있고, 혼자 일으키기도 힘든 몸은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린다. 싫다. 내가 싫다. 왜 이러는 걸까? '수술이라도 받아야 하는 걸까? 마취에서 깨어난지 못하면 어쩌지? 아니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몰라.잠들듯이 떠나면 나는 내가 죽은 줄도 모르는거잖아'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나란 인간의 머릿속엔 숱하게 겪었던 죽음. 아버지. 큰아버지, 할아버지, 외삼촌의 마지막 모습과 그동안 읽었던 책 속의 경구들이 한 구절도 떠오르지 않는다. 장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가서는 안되는데....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잠에서 깼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꿈이 이렇게 생생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고, 코 앞에 닥친 그 죽음이 내가 바라던 죽음이 아니라서 부끄러웠다.
아내가 아침 준비가 됐다고 부른다. 삼계탕이다. 입안이 까글한데 국물 한 숟갈이 스며들어 순순히 목구멍을 열어 제낀다. 맛있다. 좀전까지 그렇게 치열헀는데, 암담하기 그지없었는데 삼계탕 국물에 찹쌀밥까지 말아먹는 내가 어처구니없다. 아내와 아들의 대화에 무단히 신경질을 내며 끼어든다. 몸은 깼는데 정신은 아직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나보다. 다시 좌절한다. 꿈이나 현실에서 나는 한참 모자란다.
이런 날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욕보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력감이 찾아온다. 아내는 집 근처 카페에 가겠다고 한다. 과제도,해야 할 공부도 많다고 한다. 파주 출판단지로 같이 가자고 했다. 아내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뭐라도 해야지 주저앉아 있어서는 오늘 하루를 날려버릴 게 틀림없다. 미세먼지가 심하다. 내 머릿속에도 잔뜩 끼어있다. 자주 찾던 곳인데 오늘따라 사람과 차들이 많다. 주차를 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제서야 내일이 어린이날임을 깨닫는다. 게다가 연휴의 시작 아닌가. 차를 돌려 사무실로 갔다. 먼길 돌아 흐린 날의 드라이브를 한 셈이다. 건물 앞에 도착하니 젊거나 어린 친구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주차장까지 막아선 행렬이 길다. 바로 옆 건물 매장에서 할인 행사가 있을 거란다. 아내는 이내 자리를 잡았고, 나는 내 방 쇼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는다.
"이 새벽에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만, 젊다는 것은 바로 천국과 같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詩)가 눈에 들어 온다. 눈꺼풀이 감긴다. 잠들었다 눈을 뜨면 꿈 속일까? 지금이 꿈인가? 잠이 죽음과 같은 건지 죽음이 영원한 잠인지도 헷갈린다.
아.....어제 엄마가 CT검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잠들며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