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 나앉는다'는 말은 알았지만, 그 심정을 상상은 해봤지만, 상상과 현실의 간극이 그리 클 줄은 몰랐다. 아는 분 회사의 방 한 칸에 진지를 구축해 시작한 사업이었다. 제법 틀을 갖춰갈 즈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창공을 날을 채비를 했고 뱅뱅사거리 큰 빌딩에 사무실을 구할 수 있었다. 공간은 넓고 깨끗했으며 임대료는 파격적으로 쌌다. 물론 한 층의 일부였지만 인원에 비하면 남는 공간을 뭘로 채울 지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굳이 단점이라면 전전세라는 정도랄까. 그 층을 임대한 회사와 계약하는 방식이라 좀 불안했지만, 그 회사는 번듯한 글로벌 식료품회사의 한국지사였다.
토요일. 계약을 위해 빌딩 근처 커피숍에서 그 회사 대표를 만났다. 초등학교 2,3학년쯤 됐을까 어린 딸을 데리고 나왔다. 왠지 서두르는 듯한 느낌이나 미덥지않은 인상이 그 아이로 인해 씻기는듯 했다. 보증금은 일요일에 치렀다. 그리고 월요일. 사무실 집기며 각종 이삿짐들을 싣고 출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날 그 회사는 부도가 났다. 그 회사가 건물주에게 준 억대의 보증금도 어음이었으며 만기일은 월요일 그 날이었다. 경찰 간부인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곧 연락이 왔다. "잊어라. 사기로 여러사람이 엮여있는데다, 전과도 있네"
다시 떠올리고 싶지않은 그리고 아내도 모르는 그 날을 기억하게 된 것은 오늘이 '스승의 날'이어서다. 내게 있어 그 대표는 '스승'이었다. 정규 교육을 밟았고, 선친이 선생님이셨으니 누구보다 '스승' '사제간...'이란 단어에 감상이 남다른데 그 인간이 먼저 떠올랐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고, 지금도 '스승'으로 여기는 많은 친구, 선배, 후배, 지인들이 있다. 뵌 적은 없지만 훌륭한'스승'을 책에서 만난다. 그런데 짧은 순간 그처럼 강렬하고 인상적인 가르침을 준 적은 드물다. 날려버린 보증금을 갚아나가는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채용 면접에서였다. 경력이나 인성이 괜찮다 싶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당신에게 가장 큰 교훈을 준 사람은 누구며 어떤 것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전 직장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렇군요. 어떤 분이셨는데요?"
"시행사였는데 곁에서 지켜 봐온 바에 의하면 '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런데 뭘 배울 수 있었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부지런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기도 부지런해야 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