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현대인의 삶에는 '마약'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코카인이나 헤로인, 아편과 같은 것들은 돈이 없어서도 못사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정신을 잃는 것이 두려워 마취없이 내시경을 받거나, 성분이 무엇이건 주사바늘을 통해 내 몸 안에 들어오는 약물을 의심부터 하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게다가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강력하며 부작용 없고 효능이 오래가는 마약이 지천에 널렸는데 다행히 나는 그 중에 몇 가지를 알고 있다. 첫 손가락에 꼽는 것이 '여행'이다. 내 나름으로 여행을 분류하는데 크게는 관광과 여행이고, 세분한다면 Travel, Tour, Trip, Journey다. 여행(旅行)은 '나그네(旅)가 되어 다닌다(行)'이고, 관광(觀光)은 '경치(光)를 보러(觀)다닌다' 라는 뜻이 되니. 여행은 나그네를 자처한다는데, 관광은 보고 즐긴다는데 방점이 찍히니 내가 말하는 '여행'은 그야말로 '旅行'을 말한다.
주변 사람들과 여행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보면 '시간'과 '비용'에 관한 걱정이 뒤따라온다. 그렇다면 나는 시간 여유가 많고, 넉넉한 사정인가? 결코 아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던 지난 10년간 단 하루도 월차나 연차를 쓰지 못하고 야근을 밥먹듯 하던 와중에 떠났고, 몇 년 전에 북유럽 가족여행을 떠날 때는 내가 급성복막염 수술을 받은 지 일주일도 안됐을 때인데다, 그 기간 중에 하필 미뤄졌던 중요한 계약일정이 잡혔다. 나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계약서 대신 영문진단서를 쥐고 떠났다. 계약파기로 그 해 우리 사무실은 적자로 고전했고, 대표인 나는 은행문턱이 닳도록 대출을 받으러 다녀야 했으며 카드돌려막기를 배우게 됐다.
직장 생활 중에는 새벽 2~3시에 퇴근하다가 문득 바다가 보고 싶고, 안보면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차를 돌려 동해로 달렸다. 해돋이를 보고 물회 한 그릇을 비우고 그 길로 출근했다. 영어로 하자면 Trip인 셈이다. 가족과 떠난 터키와 스페인의 배낭여행이나 북유럽 자동차여행은 동사의 의미를 가진 Travel이라고 볼 수 있다. 기약없는 오랜 여정의 의미를 지닌 Journey는 오랜 꿈이고, 뚜렷한 목적이나 일정으로 떠나는 Tour는 출장을 겸했으니 내 기준에서는 '여행'이 아니다.
영어권에서 여행이 더 세분화 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동양권의 유람(遊覽)문화보다 일찍, 더 많은 관심을 둔 것 같다. 보는 것이 중요한 에스키모의 언어에는 눈(目)을 뚯하는 단어가 쉰 두가지가 있다하니 아니 그런가.
내가 권하는 여행(Travel & Trip)은 '시간'과 '비용'보다는 '용기'와 '실천'이 더 필요하고 한국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어느정도 '무모함'을 수반해야 한다는 정도다.
특히 내가 즐겨하는 Trip의 경우에는 금요일 새벽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갑갑함이 느껴져 새벽 첫 기차로 남도의 아무 섬으로나 무작정 떠나는데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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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중국에서 회사를 하는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언제 한번 오겠냐는 청에 '내일'이라고 답하고 다음날 새벽에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꽤 오랫동안 미뤄왔던 터라 미안했다.
그날 밤을 자는둥 마는둥하고 인천공항으로 갔다. 항공사 프론트에서 비자를 보여달란다. '중국이 비자가 필요한건가...?' 중국은 초행이 아닐 뿐더러 수 없이 다녀와었다. 비자가 없다고 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줬다. 곧바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는 메뉴얼을 건네줬다. 찬찬히 읽어보니 내게 해당되는 케이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공무원이 아니니 급한 공무(公務)도 아니고, 현지 대사관을 통해야 할만한 시급한 사유도 없었다.
여권을 돌려 받고 공항을 나오며 중국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야 나 못가" "왜? 너 데리고 다닐려고 차도 렌트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사유를 말해줬다. 말이 없다 "너도 참...." 통화를 하는 중에 아침이 밝았다. 그제서야 정신도 맑아졌다. 그러고보니 그 동안 중국을 다니면서 내 손으로 비자신청을 한 기억이 없었다. 직원에게 여권을 건네줘서 항공편을 잡거나 여행사를 통했었다. 웃음이 스물거리며 새어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무작정 썍을 메고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 이골이 난 아내조차도 혀를 차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담신도 참...." 무단히 화난 척을 했다 "왜 안 챙겨줬어?" "당신이 사전에 다 준비해둔 줄 알았지. 통화하면서 '내일 갈게' 하길래..."
'무모함'과 무식함'은 다른 말이다.
여행을 꿈꾼다면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질문부터 하고답해야 한다. 어디에 가치를 둘 것인지가 정해졌다면 나를 잡아두는 사슬부터 끊는 '용기'가 필요하고, 미루지 않는 '실천'을 '당장'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