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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로 하는 일

슈퍼모델 한혜진

by 문성훈

작은 얼굴에 찢어진 눈, 껑충한 키에 마른 몸. 튀어나온 입이 웃을 때면 잇몸이 드러나는... 어르신들 눈에는 옛날에 태어났으면 박복하다고 소박맞기 딱 좋다 하실 수도 있다.
게다가 나조차도 선입견을 떨치지 못한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졌고, 그것도 지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모델'이다.

한혜진은 모델이다.
TV를 자주보는 편은 아니지만 전직이 운동선수였건 아나운서건 인기를 구가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믿기에 최근 들어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연예인'이다.
특히 짜여진 콘티나 대본없이 오가는 오락프로에서 보이는 그들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는데 재치와 어휘선택, 순발력과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패널들이 한 인물을 두고 시청자를 대신해 궁금한 점을 묻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프로에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세계무대에 진출해 성공한 첫 사례로 꼽히는 인물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성공에는 '운'보다는 '노력'이, '자질'보다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믿는 나로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 '운'과 '자질'을 먼저 인정했음에도 그동안의 '노력'과 '습관'이 지금의 그녀를 있게 했다는데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했다.

국내 최정상 모델로 대우받게 되면서 그대로 안존(安存)하려 했지만 소속사 대표의 오랜 설득으로 신인으로 뉴욕에 진출했던 것이 먼저의 '운'이라면,
합숙소에서 남보다 두시간 먼저 일어나 준비하고 소파에 앉아있었고 길치라 지도를 들고 오디션 장소를 찾아 헤맨 것은 '노력'이다.
큰 키. 작은 두상, 긴 팔과 다리가 모델에겐 숙명과도 같은 타고 난 '자질'에 해당한다면 매일 같이 일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의 극심한 '다이어트'와 늦은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는 하루 두시간의 꾸준한 운동은 몸에 배인 '습관'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구분하고 있다.
자존심은 상처를 받지 않으려 발톱을 세우는 데서 시작하니 이기심을 가지게 되고, 자존감은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고 스스로를 격려하니 자기애로 충만해진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국내 최정상 모델이던 그녀에게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뉴욕을 향했던 '결단'과 '용기'가 있었다.
1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하루 서른개의 오디션을 쫒아다녔다. 기라성같은 세계적 톱모델들 틈에서 북한 사람이냐는 질문에도 자존심 상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자존감'과 '자기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존감'은 자신을 지켜내고 마침내 정상에 설 수 있게 하지만 결코 남을 딛고 서거나 편법을 쓰는 비겁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선지 모델계의 악습인 '똥군기'를 없애는데 일조한 선배 중애 꼽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만 남에게 대우하기를 강요하거나 비교 대상이 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업계에서 '을'일 수 밖에 없는 후배 모델을 대표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까칠하게 구는데는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계 진출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가본 사람이 있어 뒤따르는 후배들은 좀더 수월하지 않을까...후배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고..."
최근의 방송 출연도 그런 맥락이라고 했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과한 겸손보다는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름답다.

"....모델은 껍데기로 하는 일인데...연륜이 쌓일 수록 배우는 연기가 늘고, 가수는 실력이 높아지는데 모델은 정반대로 그렇지 못하죠. 어쩔 수 없이 몸이 망가지고.... 모델을 비하하거나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델이라는 직업이 가지는 슬픈 단면인데... 요즈음은 예전같지 않아서 다양한 모습의 모델이 활동해서 다행입니다. 나처럼 슬퍼하는 사람이 줄어드니까...."
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 막연한 환상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희망을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녀 나이 36이다. 예전같으면 모델로서 할머니에 해당한다. 그런데 현역이다. 현역으로 90세까지 활동하고 싶다는 농을 했다. 그래서 지금도 꾸준하게 몸을 관리한다고 했다.
"일도, 사람도 마음대로 되지않는데 유일하게 내 몸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지식과 언어는 열심히 갈고 닦아도 그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데 몸은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바뀌는 몸은 자존감이 올려줘요..."
나는 그녀의 매끈하고 탄력있는 몸보다 섹시한 생각에 반해 팬이 되기로 했다.

그녀는 이 시대 진정한 프로 (Professional)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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