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말하는 '색깔' 혹은 '색(色)'은 물체가 가진 고유한 물리적 성질이 아니다. 각기 다른 빛의 파장에서 그 물체가 흡수하지 않고 반사하는 파장을 감지해서 뇌에서 주관적으로 합성해서 명명한 인간의 감각일 뿐이다.
즉 우리 눈으로 보는 두개의 빨간물체가 파리나 개에게는 전혀 다른 색으로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색이 실은 그 물체가 반사하는 파장이지 흡수한 파장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엄마 손을 잡고 초등학교 입학한 그 날로부터 정규교육을 마친지 오래인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듣고 접한 색깔(color)는 무엇일까? 학교를 상징하는 흰색, 회색, 검정 그 밋밋한 무책색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빨간색이 아닐까 싶다. 불조심 포스터를 그릴 때도, 교실 한 구석 소화기도, 교복의 명찰도 빨간색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허구헌 날 쳐다보던 칠판은 녹색이었으며 화단도 녹색으로 덮혀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보다 더 넓은 운동장은 황토객이었는데 유독 빨간색이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아마도 뇌리에 깊숙히 새겨진 반공교육탓이 아닌가 싶다. "빨갱이"란 말. 빨간 깃발, 인민 재판, 완장..... 빨갱이로 연상되는 빨간색은 공포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었고, 그렇게 교육받았으며 불가촉 영역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다.
언젠가는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한게 아니라 "나는 빨갱이가 싫어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었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어른 팔뚝에 찬 완장의 생소하기만 한 빨간색이 싫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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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가 언제인데 나는 아직도 '빨갱이'가 넘실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광화문을 가도, 유튜브 동영상을 틀어도, SNS상에서도 '빨갱이'란 단어를 쉽게 접한다.
빨갱이를 때려잡자는 사람도 빨간색을 입고 흥분하고, 빨갱이로 지목당한 사람들은 빨간색 머리띠를 두르고 격분한다.
내 눈엔 빨간색이 지천에 널려있고, 모두가 '빨갱이"다.
빨갱이를 때려 잡자는 사람들은 태극기를 휘두른다. 우리나라 국기다. 애국심이 출중한 사람들인 모양이다. 손에, 머리에, 가슴에 온통 태극기를 휘감고 몰려 다니며 목청을 돋운다. 그들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선명한 빨간 옷을 입은 '빨갱이'들인데 말이다. 그러니 학창시절 운동장 높은 깃대에 매달려 파란 하늘에 나부끼던 성스럽던 그 '태극기'가 아닌 것만 같다.
산행 중에 목이 잘려나간 석불의 머리통이 산기슭 돌틈에 뒹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걸 봤을 때 기분이다.
차라리 성조기가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산뜻하다. 이스라엘 국기는 비싼 요리위에 뿌려진 트러플처럼 귀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 만국기다. 운동회날 우리들 머리 위에 나부끼던 만국기가 땅바닥에서 뒹군다. 그래도 여전히 태극기가 대세이니 자랑스러워 해야할지 모르겠다. 빨갱이로 지목당한 사람들이 먼저 태극기를 쥐었다면 이들은 무슨 깃발을 들었을까 궁금하다.
'빨갱이'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모든 색(色)은 우리 뇌가 합성한 인간의 감각일 뿐이다. 인간이 정한 색이고, 이름 붙였을 뿐이다. '빨갱이(Red)'는 억울하다. 다른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무엇도 하지 않는 짓을 제멋대로 지가 보이는 대로 이름 지워놓고서 욕하고 삿대질하고 저주한다.
'빨갱이(Red)'는 사실 '빨갱이(Red)'가 아니다. 우리 눈으로 감지하는 것은 그 물체가 반사해 버리는 즉 흡수하지 않는 빛의 파장이니 결국 거부한다는 뜻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빨갱이가 아니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실제 '빨갱이' 이고, 빨갱이로 지목당하는 사람은 빨갱이가 아닐 확률이 100%다. 흡수하지 않고 반사하는 파장을 감지하는 색깔처럼, 흡수하지 않고 거부하는 생각을 읽어내는 인간의 한계는 어쩔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