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손가락에 꼽는 분들은 일상에서 시어(詩語)를 뽑아내듯 담담한 어조로 깨우침을 주는 분들이다. 길가에 핀 들꽃에, 풀숲에서 날아 오른 작은 새에게서도 무한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고, 발에 채이는 돌부리에서 새벽 녘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에서도 삶의 정수(精髓)를 찾아 낸다.
두번째는 방대한 독서량과 해박한 지식으로 가히 책 한 권을 몇 줄로 요약하는 분들이다. 문학은 물론이고 세계 역사와 예술, 어려운 철학적 사유까지 행랑채에서 새끼 꼬며 들려주듯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감히 접하기 어려운 물리학, 손이 안닿는 천문학,내 안의 꿈틀대는 생명 이야기까지 현미경을 내 손에 들려주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마지막은 열심히 사는 분들이다. 푸근한 옆집 아저씨기도 하고 미용실에서 파마 말고 앉은 아줌마같은 이웃들인데 그들이 들려주는 세상이야기는 눈물과 땀이 세월로 숙성된 젓갈처럼 오묘한 맛이 난다. 때로는 홍어를 처음 맛 봤을 때처럼 자극적일 때도 있지만 이내 다시 찾는 중독성를 가지고 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을 감히 스승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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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알고는 지내지만 마주치면 인사정도는 건넬 수 있지만 같이 차 한잔 할 시간은 아까운 부류가 있다.
첫번째는 자신의 능력이나 지식을 과신하거나 매몰되어 마치 사이비 교주라고 착각하는 듯한 전문가 집단이다. 주로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병풍으로 치는 경우가 많은데 직관이 빠른 사람이면 올려진 사진에서도 감이 온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쓰는 어휘도 대체로 현학적이다. 대체로 영어에는 강한데 한국말에는 약하다.
두번째는 표리부동한 케이스인데 학식과 덕망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면모를 드러낸다거나 소시민인척 어깨동무를 하는데 실생활에서는 화려하고 자기과시적인 삶을 지향하는 경우다. 의외로 많이 보게되는데 대부분 어디선가 봄직한 대가들의 말을 옮기거나 사례를 든다. 맞는 말이고 잘 쓴 글인데 삶에서 체화된 글을 찾기는 어렵다.
세번째는 덕후기질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다. 주로 정치적인 사안이나 사회적 이슈에 매몰되어 있는데 주유소 습격사건의 무대포처럼 '한놈만 패는'경향을 보인다. 거친 표현과 일방적 주장만이 난무하니 어지럽기 그지없다. 간혹 식견이 종편 패널 이상인 분들을 만나는데 시야를 넓혀주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주니 이들과는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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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에 쏟아붓던 폐기물만큼이나 많은 정보와 지식 그리고 새로운 소식들이 산을 이루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옥석을 가리고 내게 필요한 것들을 수습하는 데만도 하루가 부족한 내게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는 유용하고 고마운 도구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만사가 그러하듯 자칫 중심을 잃거나 한 눈을 팔다보면 악취에 혼미해지거나 낙상하기 마련이다.
난지도는 이미 아름다운 공원이 됐지만 쓰레기더미위에 얕은 흙이 덮혀있을 뿐이다. 침출수는 언제까지 흘러내릴 지, 심은 나무는 착근(着根)이 제대로 될지 알 수 없다. 짐작컨데 노송이나 주목(朱木)을 바랄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녹음(綠陰)에 감탄하고,공원에서 바라보는 노을에 취해 딛고 선 땅이 무엇인지 잊지는 말아야겠다.
노송이 되려면 가을 낙엽을 뿌리짬에 묻고 한 겨울을 나는 시련을 겪어야한다. 그래야 봄에 새 순을 틔우고 한 여름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 낙엽은 독서나 사색일테고 시련은 삶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