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하시기 전. 아버지는 아이들 걱정이 많은 며느리에게 이르셨다. "아무 걱정 하지마라. 엇나가지 않을거고 설사 잠시 방황해도 제자리 돌아올테니..." 나는 그 말씀의 어원(語原)을 안다.
36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는 자리에서 선생님들은 내게 한마디 하기를 권했다. 아버지를 다시는 모실 수 없는 존경스러운 교장선생님이라던 여선생님들은 눈물을 훔쳤다. 마이크를 잡았다. "아버지께서는 다정스런 지아비도, 친구같은 아버지도 아니셨지만 훌륭한 스승이라는 사실만큼은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여쭸봤었다. "아버지. 평생을 교육에 몸담으셨는데 결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뭡니까?" "'왕대밭에 왕대 난다'다" '콩 심은데 콩난다'쯤 되는 말인데, 아버지는 이마에 '임금 왕(王)자가 새겨진 한국 호랑이를 빗대 용맹한 호랑이에게서는 허약한 새끼가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버지, 어머니가 올바르게 제대로 살았는데 자식이 어긋날 리 없다고 부연해서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런 일화를 들려 주셨다. 가정방문이 있던 시절이라 가방에 체인을 넣고 다닐만큼 싸움꾼이고 골칫덩이인 제자의 집을 방문하셨다. '어떤 환경일까?'라는 궁금증으로 부모를 만났는데 인품도 훌륭하고 다른 형제들 역시 잘자란 화목한 집안이었다.
그리고 평소 모범생이고 성적도 우수한 반장의 집을 방문했는데 너무 의외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술주정꾼에 어머니 역시 곗돈 떼어먹기 일쑤이니 동네 인심 잃은 지 오래인 집안이었다.
그리고 말썽꾼 제자는 성적은 안되지만 몸이 날래니 3사(3군 사관학교)를 보냈고, 모범생 반장은 공부를 잘하니 서울대에 입학했다.
ㆍ 어느 해인가. 집으로 가는데 도로에 검은 세단 몇대가 도열해 있었다. 시골에선 드문 광경이다. 또 골목과 우리집 대문 양측에는 검은 양복에 검은 선글라스을 쓴 건장한 사내 너댓명이 장승처럼 서있는게 아닌가. 직감했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신거구나. 이번엔 큰 사고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떤 사내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 내 아들.. 우리 장남이다" "아...니가 선생님의..." 그 사내는 말썽꾼 제자였다. 대위로 전역해서 발군의 사격술과 무술실력으로 경호실에 차출되어 대통령을 모시고 고향(내 고향에는 대통령 별장이 있다)을 찾게돼서 선생님을 뵈러 왔다고 했다. 높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ㆍ
좋은 부모슬하에서 컸던 말썽꾼 제자는 대통령 경호원이 됐고 아버지를 평생의 은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개천에서 용이 난' 케이스인 모범생 반장은 어떻게 됐을까. 아버지는 그 제자의 근황을 알고 계셨다. 외국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은행에 입사했는데 얼마 후 수억원의 공금을 횡령해서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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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계의 큰 어른이자 영부인이셨던 이휘호여사께서 별세하셨다. 위중하다는 소식에 입에 담지 못할 아니 담아서는 안되는 패륜적 언사를 한 이가 수능만점자 출신의 서울대생이라고 한다. 불현듯 선친과의 지난 날 대화가 떠올랐다.
참담하기 이를 데 없고 소스라치게 두렵다. 20대초반의 젊디 젊은 청춘이고 희망을 거는 세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병들게 했는지 암담하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건강한 죽순이 땅을 뚫고 나올 것을 믿는다. 우리가 비를 내려야 한다. 이 땅을 더럽히는 검은 비닐을 거둬내고, 거름이 되어 제대로 썩을 각오를 해야겠다. 우리가 곧 조상이고 부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