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지만 다행이다

by 문성훈

책을 좀 더 일찍 가까이 했었으면 좋았을 걸... 그 시기에 끊김없이 공부를 더 했었으면, 이제서야 깨달은 많은 사실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지금의 삶과는 사뭇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나마 다행이다'라는 자기위안으로 귀결되기는 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생이자 교수인 후배가 있다. 보기 드문 수재인데다 미국에서 교수를 했을 정도니 학문의 깊이나 식견이 남다르다. 게다가 독서광인데 가끔씩 감명 깊게 읽은 영어 원서를 건네주기도 하고(곤혹스럽다) 무식한 형을 위해서 주요 대목을 직접 번역해서 메일로 보내주는 수고를 마다않는 사랑스럽고 깜찍한 친구다.

독서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가장 처음 접한 책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었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하도 질문을 해대니 지친 나머지 그 책을 읽어보길 권했다고 한다.
내 기억에 가장 처음 접한 책은 '김찬삼의 세계여행'이었다. 인도편에서 본 땅에 머리를 묻고 수행하는 사람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만약 내가 처음 접한 책이 '여행기'가 아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었고 어려서부터 말뚝박기 대신 독서에 빠졌더라면 진로나 인생이 바뀌었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아이들과 제자에게 독서를 권하지만 실상 내 독서 편력은 짧고, 독서량은 형편없다.
게다가 기억력도 부족해서 감명 깊게 읽은 문구를 그대로 옮기지도 못하거니와 그 페이지를 찾는 것마저 버거워한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직성이 풀리고, 겪어서 깨달은 것을 비로소 내것으로 여기며, 우둔해서 지름길을 못찾아 가시덤불을 헤치고 돌아서 도착하는 나지만 그런 세월을 보내고 뒤늦게 책을 가까이 하게되니 좋은 점도 있다.

시신경을 통해 전해진 정보 한가지는 뇌에 저장된 경험과 기억 열 가지와 접점에서 만나 스파크가 튀어야지 그때서야 주름 잡혀 내 것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뒷통수에서 뻗어 나올 경험과 기억의 실타래는 어느 정도 갖춘 셈이고 그래선지 책을 읽다 생소해서 헤매기보다는 어디선가 비슷한 느낌, 경험을 했었다는 익숙함에 편안해진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흔히 말하는 공부할 시기에 했었으면 머리 회전도 더 빠르고 성취도도 높았겠지만, 궁금하고 간절해서 하게 된 늦은 공부라서인지 지겹지도 않았고 흥미도 더했다.
거기에 죽는 날까지 성에 찰 만큼 할 수도 없으려니와 학문의 세계가 너무 넓고 깊은데다 나로서는 엄두도 못낼 만큼 뛰어난 사람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작했으니 자칫 오만방자했을 내가 두 손 모으고 겸손할 수 밖에 없었다.

젊은 날의 실수와 고민, 방황의 흔적들이 주름으로 이마에 자리 잡았지만 되돌려 아무런 상처없는 매끄러운 지난 날을 보낼 수 있었다면 이제와서 깨달은 소중한 것들마저 지나쳤을 지도 모르니 부질없는 추정은 안해도 될 성 싶다.
그런 의미에서 주름은 세월이 주는 훈장이지 나이테가 아니다.

아쉽지만 다행인것이 부족해서 아쉬운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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