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말씀드리는데... 신혼여행 중에 수십장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아내 말에 의하면 '한 장도 건질 것이 없다'고 괄시를 받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습니다.
제가 봐도 덥수룩한 수염에 피부마저 그을린 깡마른 동남아 난민출신 남자와 어쩌다 재수좋게 그 남자가 여행 중에 꼬신듯한 순진해보이는 추레한 복장의 백계 러시아 여자(아내 키가 171이고 이국적이라...)가 전혀 안어울리는 절경을 배경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습니다.
그렇게 또 야간열차 침대칸에서 배낭을 보듬고 자는 둥 마는 둥 국경을 넘었습니다. 4인칸이었는데 같은 칸의 다른 외국 배낭족과 미소는 건네지만 서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요.
신새벽에 로마역에 도착했습니다. 세수라도 하려고 역 화장실을 찾았는데 토요일 오후 1등 당첨자가 수두룩하게 나왔다는 로또판매소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처럼 세계 각국 배낭족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아... 그런데 어떤 우라질 늠은 세상에... 세면대에서 샤워까지 하는게 아닙니까?(팬티만 걸치고 수건을 적셔 온 몸을 닦는 식으로...) 차~암 부러웠습니다(?)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문화인답게, 사원에 들어가기전 무슬림의 경건한 의식처럼 세수하고 발만 씻었습니다. 그렇게 개운한 기분으로 대합실 벤치에서 배낭을 배고 잠시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데 깜빡 잠들었다 눈을 뜨니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침은 역 앞 리어카에서 파는 토스트와 신선한 우유로 때우고 거기서 만난 자전거 여행중인 한국 학생과 잠시 담소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다시 로마 시내를 쏘다니며 콜롯세움, 성 베드로 성당, 트레비 분수, 판테온....등등을 둘러보고 다녔습니다. 트레비 분수 앞 상점에서는 눈부신 무지개컬러의 미쏘니 니트도 무리해서 어르신 선물로 샀습니다.
광장 계단에 앉아 빵쪼가리를 씹으며 이탈리아 여자들은 잘 모르겠는데 남자들 한결같이 참 잘 생겼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걸친 슈트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같고, 선그라스는 다 레이 벤 같두만요. 그야말로 모두가 모델들이었습니다.
로마 여행 중에는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버스를 타며 저는 앞 좌석, 아내는 뒷 자석에 앉았습니다. 누가봐도 앞, 뒤 동양인 커플(아닌가? 아내는 좀....)인데 그... 그 놈의 깎아놓은 석고상같이 생긴 키 크고 젊은 이탈리아 놈이 아내 좌석 옆에 선 채로 무슨 아리아인지 세레나데를 부르는 게 아닙니까?(어디서 듣던 가곡인데... 아.... 그런데 솔직히 잘 부릅디다) 백주대낮에, 그것도 버스 안에서 내 여자를.... 그것도 결혼한지 며칠 안된 신선한(?) 유부녀를 꼬시다니....(안그래도 스위스에서의 그날 밤을 그냥 넘겨서 억울해죽겠는데...) 저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같은 반도국가로서 한국과 이탈리아의 외교관계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배시시 웃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배신감이란..... 그 날의 부글부글 끓던 심리적 스트레스때문인지 아니면 빡빡한 일정에 잠도 충분히 못자면서 무거운 배낭을 매고 걸어다녀서인지 허리에 담이 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어찌어찌 물어 약국을 찾았습니다. 영어회화가 능통한 아내가 허리 아픈데 바르는 연고를 말했나 본데 (이탈리아 사람들 영어가 약하더군요. 특히 발음은 더욱...) 서로 잘 안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국제언어인 바디랭귀지와 한 단어만으로 긴 서술어를 대치하는 능력이 탁월한 제가 나섰습니다. 허리를 짚고 아픈 시늉을 하며 마침내 "안티푸라민'부터 "파스" (물파스는 말 안했습니다. 그건 외래어입니다)단어까지 동원하자 그제서야 알았다는듯이 치약같은 연고와 알약을 주더군요. 뭐 대충 성분 표시와 맨솔 향이 나는 걸 보니 맞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흥정입니다. "^%& 리라!"라고 하는데(리라는 이탈리아의 화폐단위) 저는 계속 "노! 노우!.... 디스카운트!... 오케이?"만 반복했습니다. 제가 그 친구말은 듣는 둥 마는둥(어차피 그 친구 발음이 안좋아서(?) 못알아들었을겁니다) No와 Discount, OK만 연발하자. 그 친구가 두들겨 보여주는 계산기 숫자가 차츰 차츰 내려갔습니다. 뭐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허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그렇지 않았으면 더 깎았을텐데 한 30~40% 깎았나봅니다) 계산하고 약국 문을 나섰습니다.
그제서야 아무말도 안하고 토끼 눈을 하고 있던 아내가 한마디 하더군요 "아니 어떻게 약값을...."(깎을 수가 있냐는 뜻이었겠죠) 제가 대답했습니다. "여긴 로마잖아.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란 말도 몰라? 아이쿠 허리야..."(약값도 깎을 수 있다는 뜻으로... 궤변인가요? 로마의 상법은 공부를 안해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