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

by 문성훈

'아직 씌어지지않은 책'.... 노트를 명품 대열에 진입시킨 몰스킨 노트의 최초 광고 문구다.
굳이 이렇게 풀어쓰지 않아도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공책(빌空 冊책)'이란 말이 있다.
태블릿, 스마트폰 등의 기술발달로 은행창구를 찾지않아도 입출금이 자유로워 졌고, 카드가 없어도 편의점을 이용하는 세상을 살고있다.

어디 그 뿐인가 메모는 물론 간단한 스케치정도는 액정에 대고 그릴 수도 있다.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내 모든 일정을 직원들과 공유할 수 있고 그들의 일정을 알 수 있다.

세계 어디서나 아주 손쉽고 빠르게 정보를 취득하고 효율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고보니 숙력된 디지털 활용 능력으로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꿈을 펼치는 계층이 생겨났다. 소위 디지털 유목민(Digital nomad)이다.
최근들어 그들 손에 수천년동안 이어지던 명맥이 위태로워보이던 종이 노트가 들려지고 있다. 새로운 노트회사와 브랜드들이 떠오르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디지털기술과 접목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반갑다.

테크놀로지의 끝이 어디일까 궁금해했는데 어쩌면 과거로 다시 회귀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내가 10년 가까이 써오던 아이폰 시리즈를 바꾸게 된 이유는 S사의 '노트 시리즈'가 갖는 필기 기능과 페이 기능때문이었다. 간혹 긴하게 쓰일 때도 있지만 액정유리면에 대고 쓰는 필기감이 아직도 낯설고 차갑다. 4000필압을 넘겼다던데 도대체 인간의 손끝이 느끼는 미세한 감각은 얼마나 되길래 이 서늘함을 지울 수없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학창시절 공책에 지우개똥을 남기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기억. 시험시간 적막한 긴장감 속에 슥슥 거리던 연필소리를 잊지 못하는 나로서는 지우개똥을 남기지 않는 모니터나 그 소리를 지운 볼펜이 그리 달갑지 않다.

물리적 경험은 테크놀로지가 도저히 따라올 수없는 부분이다. 인간은 감정을 소모하고 근육에 새기는 물리적 경험을 통해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에 접어즐 수 있다. 상상력이 창조와 혁신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최첨단 산업에 종사하는 디지털 유목민들이 다시 '공책'을 찾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공책은 실체다. 데이터나 파일로 존재하는 0과 1의 디지털 부호화될 수 없는 자산이고 경험이다.
나는 종이의 촉감, 넘길 때의 소리를 사랑한다. 사각 사각 빗겨내는 연필깎는 시간동안 무념무상에 젖어들고 지우개가 남기는 지우개똥의 말랑한 질감이 좋다.
혀보다 눈과 코가 먼저 음식을 맛보듯 공책에 남기는 기록보다 종이를 긁는 펜으로 전달되는 질감(그래서 볼펜을 쓰지않는다), 들릴듯 말듯한 소리, 공책을 넘길 때의 팔랑거림, 책갈피가 일으키는 미세한 바람에 전율한다.

신체의 일부처럼 등짝에 매달린 내 가방 속에는 노트북과 함께 공책이 실려있다. 터치스크린이 되는 노트북이니 거의 쓰지않는 스마트 펜과 함께 연필통을 대신하는 가죽 파우치가 있다. 가방은 배낭이 되고 이것들은 내 공구이며 공책이라는 땅을 가는 농기구가 된다.

온 몸으로 삶을 경작하고 일구는 아날로그 노마드(Analog nomad)인 나로서는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들이다.



※ 왼쪽부터 스마트펜/ 파란색 잉크가 든 만년필/ 빨간 잉크 만년필/ 검정 만년필(만년필은 모두 이름을 각인했다. 저렴하거나 실용적인 제품들이다) / 2.0굵은 샤프펜슬/ 0.3샤프펜슬/ 지우개/ 형광펜/ 스케일(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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