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 철학

by 문성훈

원래 TV를 잘 보지 않지만 최근에는 뉴스와 시사프로마저 끊었다. 요즘은 현장에 자주 들른다. 사실은 거의 매일이다.

예전부터 프로젝트에 몰두하면 거기에 빠져 살기는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것은 뭔가 잊고 싶거나 현실에 불만이 차있다는 증거다. 덕분에 현장 직원들만 죽어난다. 싫어하는 기색보다는 왠일인가 궁금해하는 눈치다.

먼지나고 어지러운 현장에 들리는 일정이 있으면 늘상 야상(군복 외투)을 입는다.
15년 전쯤 구입했는데 당시에도 아내는 썩 내켜하지 않았다(좋아한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미군 누군가가 입던 구제이니 족히 20년은 넘겼을테고 내 것이 되어 수도 없이 세탁을 했는데도 박음질 하나 뜯어지지 않았다. 옛 어른들이 튼튼하기로는 미제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실감난다. 게다가 디자인도 마음에 쏙든다.(그래봤자 독수리 마크와 부대 로고지만)

내가 군 복무할 때는 미군과 합동으로 하는 팀스피리트 훈련이란 게 있었다. 훈련 중에 미군과 조우하게 되면 그들의 야상에 탐을 낸 고참들이 서투른 영어로 미군에게 접근하곤 했었다. 지금은 우리 군도 얼룩무늬 군복이지만 그 당시에는 국방색이라 불리던 카키색 군복이고 천의 질 또한 현격히 떨어졌었다.

몸집이 큰 미군들이 많아 품이 맞기 어려운데 청계천 노상에서 내 품에 딱 맞는 이 야상을 찾았을 때 (다행히 몸집이 작은 미군이 입었던 옷이었던 것이다) 나는 쾌재를 불렀고, 아내는 구입할까봐 난감해했다.
이후로 이 옷은 현장에 입고 나가는 외출복이 됐다.

직장생활을 그만 둔 이후로 나는 정장과 넥타이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캐쥬얼한 차림을 즐겨하지만 아직도 아내는 이 야상만은 입고 나가지 말았으면 한다. 이유는 알만한데 귓등으로 듣는다.
비록 무겁고 뻣뻣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바깥에서 생활하기에 이만한 옷이 없어서다. 때 탈까 걱정하지 않고 아무데나 기대거나 던져놓을 수 있고, 포켓이 많아 스마트폰, 블투이어폰, 필기구, 수첩, 지갑 키뭉치 얼마든지 집어 넣어도 쳐지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목 깃에 지퍼를 열면 후드가 숨겨져 있어 예기치 않은 비에도 끄떡없다.

내게도 패션에 대한 철학이 있다. 럭셔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구제 미군 야상과 럭셔리 패션이라고 하면 격에 안맞는다는 느낄지 모르지만 결코 아니다.
올해 작고한 샤넬의 수장이었으며 패션계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린 카를 라거펠트가 일찌기 말한 바 있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을 살라. 그것이야말로 궁극적인 럭셔리다’

오늘도 나는 아무 로고도 없는 검정 야구모자에 카키색 카고바지와 이 야상을 걸치고 백팩을 매고 나간다. 그야말로 전투복 차림이다.
요즘 나는 세상과 전투 중이고 내 자신에게 어울리는 삶을 사는 중이다. 궁극적인 럭셔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20191030_051343.jpg
작가의 이전글애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