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성훈 Dec 30. 2019

평수

인테리어 에세이

철현이네와 우리 식구까지 9명, 거기에 마당까지 딸린 20평 남짓한 일본식 관사집이 작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마당에는 늘 아버지가 키우시던 국화와 분재 화분이 30~40개 있었다.  가을이면 만개한 국화꽃 사이로 부산스런 우리 꼬맹이들이 마당을 가로질러 들락거리면서도 화분을 넘어뜨린 기억이 없으니 지금도 신기한 일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노가다(막일꾼)' '쇳딩(쇳덩어리)'라는 별명으로 불릴만큼 강골이던 아버지의 떨리던 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도 그 집 마루에서였다.
국민학교 3학년 꼬마에 불과하던 내가 그 역사적 거래 현장을 지켜 볼 수 있었던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겠다. 아마 이전에 세들어 살던 집과 지척이어서 내가 아버지를 따라 나섰을 수도 있다.
이날 빈농의 10남매중 막내로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결혼해서 12년만에 집을 사셨다. 중개인도 없이 두 분은 그 집 마루에 걸터앉아 집문서와 서류를 주고 받으셨다. 그리고 신문으로 감싼 돈뭉치를 건네는 아버지의 손이 떨리는 걸 분명히 봤다. 명절이면 큰집에서 싸주시던 포갠 시루떡모양이 꼭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그 시루떡을 하나씩 떼어내 일일이 세셨고, 아버지는 무심히 지켜보셨다. 두 분이 악수를 나누셨는지 내 기억 속 필름에는 남아있지 않다.
한참 세월이 흘러 내가 어머니께 여쭤봤을 때에야 그 돈이 300만원이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 살아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샀던 당신 집이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던 그 집은  300만원짜리다.

부엌과 맞닿은 손바닥만한 작은 방, 그리고 그 작은 방을 지나야 안방으로 갈 수 있었고 안방 미닫이문을 열면 마루와 마당을 지나 대문이 보였다. 그렇게 방2, 부엌1인 구조가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두 가구가 살 수 있었다. 마당과 옥상으로 오르는 계단밑 화장실을 공유했다.
철현이네는 우리집에 세 들어온 가족이었다, 철현이, 상현이 꽤 개구졌던 아들 둘 때문에, 술 취한 모습을 더 많이 봤던 아저씨의 주사로 주근깨 많은 철현이 아줌마의 목청은 언제나 하이 톤이었다.
그래도 내 어린 눈에는 오토바이를 몰던 철현이 아저씨의 라이방이 꽤나 멋져보였다. 어느 날엔가는 아저씨가 취한 채 담배불을 붙이면서 오토바이 핸들을 움켜잡다 그대로 튕겨나가 담벼락에 부딪치는 걸 본 적도 있다. 아마 그날 밤에도 철현이 아줌마의 "아이구 내가 못살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잠들었을 것이다. 철현이네와 우리 식구는 그다지 방음이 잘 되지않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꽤 오래 같이 살았다. 두 가족은 마당뿐만 아니라 비밀도 공유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철현이네가 살던 안방이 내 차지가 됐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그래봤자 지금 사는 아파트의 제일 작은 방만 했을텐데도 운동장처럼 넓게만 느껴져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부딪칠 때까지 떼굴떼굴 구르며 좋아했던 기억이 선하다.
제대하고서 복학하기 전 어머니는 건축학과를 2년 다녔을 뿐인(그것도 데모와 수업거부로 제대로 못다닌) 나를 감리로 내세워 그 집을 허물고 양옥으로 다시 지었다.
무허가였을게 분명한 김사장 아저씨는 달랑 1장뿐인 평면도만으로도 공사를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뭔가 아는 체하고 싶었던 내 고집으로 벽돌과 벽돌사이에 스티로폼만은 빼곡히 채워넣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외풍없이 따뜻하지만 외벽이 너무 두터워졌다.
그렇게 방4, 부엌2, 외부화장실1였던 집이 방2, 거실겸 주방1 , 내부화장실1로 재구성됐다. 마당은 다소 좁아졌지만 김장 배추 100포기쯤은 씻고 물 빼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마당까지 20평 남짓한 고향집을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어느 기사를 보면서다.

> 2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인테리어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