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먹이로 태어나 부모품에서 자라다 아이가 되어 학교를 갑니다. 친구를 만나고 부모말고도 꾸짖는 어른을 만나면서 학생이 되지요. 그 학생이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처럼 낯선 환경에 놓일 때는 이미 어른이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사회 생활에 익숙해지고 자기 중심으로 세상를 바라볼 수 있을 즈음이면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 볼 나이가 되지요. 그리고 가끔 생각해 봅니다. 나는 세상 어디쯤에 있나? 어떻게 살아냐 하나? 돌이켜보건대 사회생활을 한 이후로 이 세상은 한시도 멈춰있었던 적이 없었고, 언제나 혼란스러웠습니다. 평온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일까? 왜 그래야 하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저는 지금껏 직접 혹은 책이나 간접적으로 만난 사람들을 사회적 활동이란 영역에서 분류한다면 두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치중심적' 인간과 '관계중심적' 인간입니다.
어린 시절 제 고향집 건너편에 고물상이 있었습니다. 폐품의 무게를 다는 저울이 있었는데 매달린 추를 더하고 빼면서 좌우로 움직이며 중심을 잡는 방식이었지요. 눈금이 새겨진 그 수평 막대 양 끝에 '가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대부분은 그 양 끝단 사이 어디쯤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자신의 눈금이 '가치'쪽으로 더 가 있는 경우에는 '생활의 무게'라는 추를 더 얹어야 수평이 잡힙니다. '관계'쪽으로 쏠린 사람은 '양심'의 무게를 더 견뎌야 합니다.
자신이 지키고 싶은 고결한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살기 위해서는 배가 고플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벌기도 쉽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 지위를 얻기란 더 어렵습니다. 대체로 그런 사람은 드물기도 하거니와 세상은 속성상 그런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마련입니다. 설사 인정을 받는다고해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가 됩니다. 우리는 그런 예를 수도 없이 봐 왔습니다 .
'관계'에 치중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않는 양심과 자존심이라는 추의 무게를 견뎌야 합니다. 그래도 그 댓가는 큰 것이어서 누구에게나 인정받기 쉽고, 드러난 삶에 있어서는 안락이 보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자신은 앓고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헷갈릴 때도 있습니다만 무시할 수 있으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이 눈금 막대의 어느 쯤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시대와 상황 그리고 이해득실에 따라 삶의 무게를 달리하고 조금씩 눈금이 오가는 걸 느끼며 삽니다. 추에다 어떤 걸, 얼마나 얹을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눈금대를 오가는 송추를 누군가 억지로 옮기려 든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균형을 이루지 못해 눈금대가 아래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라가 무게를 잴 수 없습니다. 남이 얹어줄 수 없는 추라서 더욱 난감합니다.
저는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 중에 하나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사람마다의 눈금을 있는 그대로 읽어줬으면 합니다. 어떤 추를 매달고 눈금이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지 말입니다. 어떤 일,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도 송추의 위치는 한 쪽으로 치우치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하고 지지를 이끌어내야 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관계중심적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가치중심적으로 살아가려면 세속적인 욕망은 어느정도 덜어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J모씨를 두고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변했다고 비난한다든지, 정치인들에게 너무 과도한 기대를 걸었다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양심과 자존심은 추에 달아놓고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득실만 위하는 검사에게 '가치'를 위해 봉사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송추를 옮기겠다는 시도나 다름없습니다. '관계'로 안락하게 살겠다는데 말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견딜 추를 정해놓고 한 쪽으로 쏠린 채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