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그림자5

by 문성훈

병사들의 경례야 오래 전에 익히 받아봤었지만 이렇듯 정중한 90도 인사라니....
그것도 낯선 타국에서, 한 두명도 아닌 예닐곱명의 정장차림 사내들이 좁은 통로에 도열해서 고개를 숙이는 상황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한 사내가 정중하게 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좀전까지 보지 못했던 역시 정장차림의 여자가 한국말로 통역을 해준다. 나를 모시겠단다. 다시 그 여경호원 얼굴을 봤다. 한국인같기도 하다.

한국인인지 물어 볼 새도 없이 그들은 나를 그 대열의 가운데쯤에 호위하듯 이끈다. 나와 같이 탄 이코노미석 승객들도, 앞좌석 퍼스트클래스 승객들도 고개만 내밀고 미어캣 흉내를 낸다. 손을 가지런히 모은 승무원들도 90도 고개를 숙인다. '아차! 내 가방'
"잠깐만요 제 트렁크을 내려야 합니다" 돌아섰다. 어느새인가 뒷따라오는 사내의 손에는 내 트렁크가 쥐어져 있다. 예의 그 여자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아까 본 하얀 벤츠가 항공기 트랩에 바짝 다가서 정차되어있다.
한 사내가 열린 뒷 문을 붙잡고 있는게 보인다. 여전히 활주로는 비어있고 비행기들은 멈춰있다.
어리둥절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별일을 다 겪는다지만 이런 당황스런 일이 내게도 생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여긴 어디?' ' 나는 누구?'
미리 틀어놨었는지 시원한 자동차 에어컨 바람에 그나마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것 같다. 멈춰있는 것은 비행기 뿐만 아니었다. 차창밖 도로 위의 모든 자동차들이 서 있다. 질주하는 차량은 벤츠 행렬뿐이다.
부동자세를 한 경찰관들도 눈에 띈다. 이 나라의 경찰 복장도 흰색인 모양이다. 영문을 알 수 없다.

폭풍이 몰아치듯 나를 혼돈스럽게 한 반나절이 지나고 나는 지금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에 신발도 벗지 않고 쓰러지듯 누워있다.
그랬다.
내가 미국 웨스트 포인트에서 한 방을 썼던 태국 친구는 이 나라 왕세자였던 것이다. 그때 미국 교관들은 알고 있었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샤워실을 나오며 스스럼없이 어깨를 툭 치며 인사를 나누던 그 호리호리한 청년이 국왕의 아들이었다니... 나는 그저 아침 기상 시간이면 서로를 깨워주던 룸 메이트로만 알고 있었다.

그 당시만하더라도 나는 몰랐다.
이 나라 왕세자의 친구라는 사실이 내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그저 조금 있으면 저녁 만찬을 하게 될 거라는데 반바지로 갈아입어야 되는 것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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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국왕이 된 왕세자의 친구였던 그가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연락이 왔던 곳은 S그룹이었다.
실패한 장교출신의 사업가였던 그는 곧바로 태국 담당 임원으로 특채됐고 한국과 태국을 오가며 두 나라의 가교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태국 진출을 모색하던 S그룹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고 그 역시 엄청난 연봉이 보장된 재벌 그룹의 임원으로서 정년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뒤이은 정부의 요청으로 외교적 대소사를 중재하는 역할도 해냈으며 한국 교민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주태국 공관은 어려운 문제가 있을때마다 그의 도움을 청했고 그를 통하면 수월하게 해결이 됐다.
태국으로 오게 되는 외교부 인사들은 언제나 그를 먼저 만나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며 은퇴한 지금도 태국에 거처를 두고 오간다고 들었다. 한인교민들은 지금도 그를 회장이라고 부르며 존경해마지 않는다.

※ 여기까지는 태국 교민들 사이에 회자되는 비화(秘話)를 기억에 의존해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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