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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Feb 14. 2020

삶에도 디테일이 있다

비가 내린다. 1월 달력이 뜯겨나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눈도 진눈깨비도 아닌 미지근한 비가 내린다.
봄의 문턱에는 닿지도 않았는데 이번 겨울의 끝자락은 유난히 짧을 모양이다.

족히 10명은 앉을 수 있는 식탁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서랍마다 뒤져 찾아낸 리모콘으로 거실을 노래방으로 만들었던 제주도에서의 그날 밤도 비가 내렸다.
스위치를 찾지도 않았는데 정원등이 켜지는 걸로 봐서는 타이머로 작동되는게 분명했다.

부족할 게 없는 아니 오히려 넘치게 잘 꾸며진 저택에서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 건 예의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진 긴 계단을 따라 배치된 방 중 하나에 들어선 직후였다.
작은 창과 침대 그리고 붙박이장이 전부인 방은 튀지도 모자람도 없이 단정했다. 내가 객이어서 불편했으려니 생각하다 깊은 잠에 빠졌다.

숙취가 없어서인지 어디선가 상큼한 향이 배여나오는 것만 같은 아침을 맞았다.
전날 오후 늦게 도착해 시끌벅적한 밤을 보낸 다음날 치고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난 밤 동생이 늦게 잠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매물로 나온 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처럼 세세히 집안 곳곳을 누비며 나를 어색하게도 불편하게도 한 정체를 찾아 나섰다.

긴 복도처럼 계단으로 이어진 통로, 복층이 딸린 2층 층고의 거실, 주문 생산했을 라운드 통유리로 마감된 큰 거실 창,  그 창밖으로 펼쳐진 잘 다듬어진 중정과 멀리 보이는 바다. 화이트로 마감된 벽체와 원목 마루, 역시 화이트 컬러에 서까래처럼 원목 루버로 멋을 부린 천장이니 그리 눈에 거슬리지 않는 익숙한 디자인이다.

맞지않는 옷을 걸친듯한, 상품 라벨이 등을 간지럽히는 듯한 그 무엇의 정체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형 차 한잔 드려요?"  아침 식사 준비를 서두르던 동생이 건네 준 차 한잔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언덕배기에 자리잡았으니 풍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날씨마저 청명하지 않은가.
키낮은 귤나무가 들어선 뒷마당을 걸으며 떨어진 귤을 줍다 잠이 막 깼을 무렵 맡았던 상큼한 향이 이것 때문이었으려니 억측도 하며 거닐었다.

벤치에 앉아 차 한모금을 머금었다 삼켰을 때 깨달았다.
왠지 내가 머물던 공간이 어색했던 건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간이 사람을 압도하거나 강제하려 들 때 혹은 머물고 싶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소품 때문이기도 하고 쓰여진 소재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주로 공간의 구성과 배치가 좌우한다.

이 저택의 주인공은 저택 그 자체이거나 바깥에 있었다.
그 위주로 만들어진 공간이어서 조연에 불과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미흡했다. 거실은 복층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장이 너무 높았고 전체 동선을 막아선 위치에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한쪽은 수족관처럼 온통 유리로 중정이나 바깥 경치볼 수 있게 설계되어있으니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주거에 있어 인간은 조망과 피신이라는 동물적 본능을 따른다.
가령 카페에서 가장 먼저 손님이 차게 되는 자리를 유심히 관찰해보면 여러 사람이 한 눈에 들어오고 자신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다. 주로 벽을 기대고 창밖과 주위 테이블을 조망할 수 있는 구석자리다.
작은 새 역시도 둥지로 그런 장소를 찾는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또아리 튼 긴 장방형의 오픈 형 저택 안에서 그런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위해 찾은 방의 조그만 창, 두 벽에 맞닿은 침대에서 안도감을 느낀 건 당연했다.

유럽의 고성을 찾으면 그 웅장한 규모에 놀라게 된다.
홀 뿐만 아니라 식당마저도 천정은 높고 크기는 엄청나다.
그런데 당시의 생활상을 연상해보면 이해가 된다 기본적으로 성은 거주보다 성주의 권의를 상징하고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더 강했다.
그러니 규모는 클수록 좋았다. 넓지만 기둥이나 벽으로 지탱하는 구조여서 방마다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다. 천장은 높았지만 낮에는 작은 창의 채광으로 그리 밝지 않았던데다 벽이나 기둥으로 둘러쌓여 있어 그리 휑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밤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높이의 벽이나 길게 늘어뜨린 상들리에의 촛불이 조명이었을테니 층고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아늑했을 것이다. 침실의 가운데에 놓여진 침대는 모기장처럼 휘장으로 둘러친 형태다. 그렇지 않고서야 쉽사리 잠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제주도의 저택을 리모델링한다면 채광은 충분하니 벽체의 컬러나 텍스춰에 변화를 주고 창의 일부를 막거나 열고 닫는 장치에 신경을 쓸 것이다.
조명은 벽에 설치하는 브라켓과 천정에서 떨어지는 펜던트 타입을 권할 테고 파티션과  플로어 스탠드, 혹은 키 큰 화분으로 공간을 나눴을 것이다.

셜록 홈즈가 범인을 밝혀내고서 느꼈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우리는 제주도 바다를 보러 길을 나섰다.
바람이 먼저 우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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