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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성훈 Feb 25. 2020

어떤 편견-2

나는 이 도서관을 만든 사람들이 정말 책의 가치와 독서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는지 의문이다.
책은 고급 와인도 고가의 장신구도 아니다. 서가는 진열장이 아니라 보관함이다.
 
도서관은 화려한 조명과 장식으로 빛이 나는 공간이 아니라, 책이라는 광석에서 보석을 캐는 광부의 꿈틀대는 몸짓으로 완성되는 어두운 광산이다.
막장에서 빛을 내는 건 보석을 품은 광석과 광부의 랜턴이다.
유명 미술작품으로 장식된 벽에 둘러싸여 직접 공연되는 연주를 들으며 최고급 안락의자에 몸을 맡기고 책을 소품 삼아 우아한 포즈를 취할만한 장소는 아니다.  

몹시 신경 쓴 듯한 수입 의자에 대해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역시 책을 읽는 일 아닌가. 가장 편안하게 앉는 경험을 제공해주고 싶었다. 과거에 비해 우리 경제 수준은 크게 좋아졌다. 그에 맞춰 문화 수준도 높아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이 말 역시 내 생각에는 틀렸다.
책을 읽는 행위는 본능이 아니다. 들여야 할 습관이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익히는 동작이다.
책이란 매체의 속성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았다. 과도한 편의성은 오히려 독서 경험의 의미를 희석시킨다.

경제 수준은 문화 수준과 정비례하지도 않는다.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미 보여 주고 있다.
책을 많이 읽을 수록 문화 수준은 높아질 수 있겠지만, 비싸고 안락한 의자는 경제 수준을 과시하는 도구로 쓰여질 뿐이다.

유명문인을 이용료가 면제되는 특별회원으로 위촉해 특별라운지를 제공하겠다는 구상에 이르러서는 기함하게 된다.
그 분들이 누군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과정을 밟아 그 자리에 선 분들인가를 알아보고서나 하는 얘기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붉은 피를 잉크삼아 쓴 살점같은 원고들이 장식으로 쓰여진 곳에서 무엇을 느낄까?
그 분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먼저 굴을 파고, 갱도가 무너지지않게 버팀목이 되기를 자처한 분들이다. 내가 알고있고 존경하는 문인들 중에는 이런 혜택을 달가워 할 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장서가 4만권에 달한다고 한다.
"없는 책은 있어도 반드시 있으면 좋은 책 가운데 빠진 책은 별로 없을 것"이라는게 관장의 설명인데 제언을 하고 싶다 .
시설 투자액과 유지비면에서 비숫한 규모의 여느 도서관보다 월등히 높을테니 차라리 지금은 구하기 힘든 절판된 명저, 희귀하고 비싼 국내외 서적을 구비한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것이다.
어차피 고급 사교클럽처럼 허위를 과시할 의도가 있다면 말이다.

언젠가 재벌 총수의 성추행 스캔들이 있었던 강남의 갤러리카페가 화제가 됐었다. 갤러리로 쓰여지는 건물의 일부만이 카페로 쓰여졌다지만 그가 머문 VIP룸을 비롯한 모든 벽에는 고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고 옆자리에 앉을 여종업원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VIP를 상대하는 고급 술자리를 위한 갤러리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보인다.
갤러리 간판이 술집의 이미지을 가려주고 1억을 호가하는 작품을 장식으로 쓰는 술자리는 아닐망정  그동안 누리던 독서라는 호사마저 부자들과 차별받는 듯한 상실감을 누군가는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없다.
즐길거리가 일반 서민이 엄두 내기 힘든 값비싼 양주가 아닌 비교적 저렴하게 살수도 빌릴 수도 있는 책인데다 다른 사람이 시중 들 필요도 없다.
더구나 책 속에 박힌 귀한 가치를 채굴하는 일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노동이고, 몸으로 체득한 숙련공만이 누리는 혜택이다. 그런 점에서도 책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발명품임에 틀림없다.

나는 한 귀퉁이에 구겨져 그림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이와 딱딱한 의자일 망정 빈 좌석이 날 때까지 서가 앞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서점이 좋다.
사각대는 책 넘기는 소리를 연주삼아 변변한 그림액자 하나 없이 책으로만 둘러싸인 무료한 공간이야말로 보석을 채굴하는 광산이다.

ㆍㆍㆍㆍㆍ

※사진은 오래된 오페라극장을 리모델링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노(El Ateneo)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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