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에 인간은 자신을 보호해 줄 딱딱한 껍질도 없는 나약한 털복숭이 유인원에 불과했다. 생존을 위해 사나운 동물과 사냥감을 다투고, 조개를 줍기위해 강가를 헤매야 하는 하루하루는 전쟁이었다.
다행히 배를 불리고 동굴에 몸을 숨겼어도 내일은 어떤 위험속에 먹잇감을 찾아나서야 할지 모르는 불안과 긴장 속에 잠이 들었다. 스릴과 서스펜스가 반복되는 그들 삶에서 "뻔한 날들의 연속" 이라는 현대인의 고민은 지나친 사치고, 심지어 "사는 게 재미없다"거나 "모든게 덧없다"는 황량한 느낌은 있을 수가 없었다.
현대인은 이제 눈에 보이는 생존의 무게를 덜고 정서의 공백이라는 은밀하고 고질적인 병을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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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진 생존의 무게만큼이나 예기치않게 주어진 시간적 여유도 이 정서의 공백에 일조하는 게 분명하다. 현재 한국사회는 COVID19라는 공동의 난제가 가져다 준 사회적 단절과 시간적 간극에 당황스러워 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후배는 재택근무라는 준비하지 않은 환경에 어색해하고, 독실한 신자는 그동안의 주말 루틴이 깨져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안절부절한다. 개학이 연기된 학생들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각종 모임과 행사가 줄어든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은 앞당겨졌다.
반면 그동안 상대적으로 느긋했던 주부의 생활 패턴은 마트에서 한달치 장을 보고, 마스크 구입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당겨진 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었고, 일감이 쏟아진 택배기사의 잰 발걸음과 배달음식점 주방의 끊이지 않는 도마 두드리는 칼질 소리만이 요란스럽게 들리는 듯 하다.
어찌됐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갑자기 주어진 이 시간의 간극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자유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번 참에 휴식을 취하게 된 걸 기꺼워하고. 하루하루 매상으로 한달 임대료를 내야하는 영세 상인들은 빈 좌석을 바라보며 한숨 짓는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한결같이 이 시간적 간극을 가져다 준 원인에만 주목하고, 그 여파에 골몰하며 종결이 언제가 될지 궁금해기만 하는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시간의 간극 또한 삶의 일부로 엄연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 순간에도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자신의 수명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오히려 문명의 발달로 정서의 공백이 가져다 준 '따분함' '무료함' '덧없음'을 치유하거나 메꿀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는 없을까?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자신을 무료하고 따분하게 했던 정체를 파헤치거나 이전에 없던 과감하고 새로운 시도로 나름의 해법을 실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를 좀먹는 '모든 것의 덧없음'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지, 무엇을 원하는 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이 시간을 할애한다면 결코 아깝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숫자를 카운트하는 뉴스 화면에 눈을 꽂고, 별 중요하지도 변하지도 않는 정치권의 동향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이전의 반복된 일상과 다를 것이 없다. 그동안 제쳐 두었던 어렵고 지루하지만 명작으로 평가받는 책 읽기에 도전하고, 마스크 주문에 골몰하느니 새로운 책을 주문해 글빚을 지기를 권한다.
미뤄뒀던 드라마를 몰아보느니 시간에 쫓겨 보지 못했던 세상 안팎의 풍물과 명사의 강연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나처럼 문외한이어도 그림 전시회를 가보고 막귀라도 클래식 선율에 꾸벅꾸벅 졸아보는 경험도 괜찮다.
그도아니면 배낭의 메고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거나 산행이나 산책으로 사색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유용할 것이다.
하다못해 시도할 때 마다 실패했거나 시간이 걸려 도전하지 못했던 요리라도 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도 좋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지금의 상황은 언젠가 매듭이 지어질 것이다.
이번 일로 천지개벽할 만큼의 변화나 인류의 존망을 다툴 가능성은 희박하다.
시대의 조류이고 잔잔하다 한번 일어난 높은 파도다. 무언가 의미있는, 이전에 해보지 않았던 시도를 해봐야한다.
이 참에 자신이 지루하고 반복된 무의미한 헤엄질이 무색하게 조류에만 떠밀려다니던 해파리였다면 과감하게 수면 밖으로 튀어오르는 날치가 되어보면 어떨까?
물속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바깥 세상 공기가 자신을 치유해 줄 지도 모른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흐믈거리며 떠다니다 그물에 걸려 버려지는 해파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