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닝 바지 그대로 입고 출근을 했다. 으레 트레이닝복이라면 있을 법한 옆줄도 없고 로고도 눈에 띄지 않으니 평상복이나 다름없이 보일거다. 핏도 살고 실용적인 디자인인데 무엇보다 편하다. 오후에는 고객과의 미팅이 잡혀있지만 그리 격식을 갖춰야 할 자리는 아니다. 작년에 인테리어작업를 했던 인연으로 이후에도 좋은 만남을 가지는 사이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정장 수트을 입고 출근했던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하다. 첫 직장은 자켓(싱글)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반팔 와이셔츠를 입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 자취를 하던 나로서는 매일같이 하얀 와이셔츠를 다려입고 출근하는 일이 버거울 수 밖에 없었다.휴일이면 일주일치 와이셔츠를 빨아서 다려놓아야 했다.
사무실에만 앉아있는 업무도 아니고 먼지나는 현장을 수시로 돌아봐야 하니 반나절이면 와이셔츠 깃이 더럽혀지기 일쑤였다. 계절 한 바퀴를 구르고 난 후 슬금슬금 변신을 시도했는데 가끔씩 수트가 아닌 싱글을 입고 다녔다. 별 말이 없어서 늦가을 쯤엔가는 목을 죄던 넥타이를 풀고 스카프를 두르고 출근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관리이사님 호출이라는 비서의 전갈을 받았다. 말단사원으로 뵐 일이 드물었는데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었던 게 화근이다. "ㅇㅇㅇ씨 복장이 그게 뭐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출근해서야 되겠어?" 이왕 이렇게 됐으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제 일이 온종일 사무실에서 보는 일도 아니고 현장 한번 나갔다 들어오면 먼지 터는데만 한참 걸립니다. 자취하는데 일보다 빨래하기 힘들어 죽겠습니다. 그렇다면 점퍼라도 지급해주시던가요" 예상치못한 당돌한 대꾸에 이사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 것도 같았다. "뭐? 알았어. 가봐" "넵" 다음날로 계열사 현장직이 입는 점퍼가 지급됐고 출근할 때만 정장차림으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물론 그마저 잘 지키지 않았지만....
그 시절이 가끔 그립기도 하다. 잘 다려진 와이셔츠에 칼같이 주름잡힌 수트차림으로 하이힐에 한껏 멋을 부린 아가씨들 사이를 걸어면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고 배에 힘이 들어갔다. 현장에서 수트차림은 나와 작업자를 구분짓는 주요한 장치 역할을 했다. 낯 모르는 외부인은 으레 내가 책임자일거라 짐작하기 마련이었다. 마음이 동하는 날은 와이셔츠 소매에 커프링크스로 멋을 부리기도 하고 넥타이 핀을 꽂기도 했다.
내가 선택한 첫 수트는 더블 수트였다. 그래선지 지금도 수트하면 더블 수트를 연상하는데 왠지 격조있어보이고 정돈된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자주 입지는 못했다. 좋아하는 것과 어울리는 건 별개의 문제다. 언젠가 수트를 사러갔다가 내가 점원에게 물었다. "더블은 항상 입고는 싶은데 그리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네요" 경력이 꽤 되어보이는 그 분이 말해줬다. "아무래도 그렇죠. 다른 재킷도 그렇지만 특히나 더블은 배도 좀 있고 품이 넉넉한 분들이 제격이죠. 중후해보이기도 하고..."
얼마전 부부동반으로 친지 결혼식에 가느라 아내는 늘 외출할 때 딸의 의견을 묻는다. 딸아이는 회화를 전공해서인지 패션 감각이나 디자인에 나름 일가견이 있어서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더블 수트를 꺼내 입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딸이 품평을 했다. "와우~ 아빠 잘 어울린다. 아빠 그거 입고 가세요" 어느덧 더블 수트가 몸에 붙는 나이가 됐다.